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종환호 (문단 편집) ===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기 === [include(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아시안 게임)]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3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CD313A 20%, #CD313A 80%, #B71D27)" {{{#ffffff '''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 {{{-1 {{{#ffffff ''' 김찬기호 ''' }}}}}} || {{{-1 {{{#ffffff ▶ }}}}}} || {{{-1 [[박종환#s-4|{{{#ffffff ''' 박종환호 ''' }}}]] }}} || {{{-1 {{{#ffffff ▶ }}}}}} || {{{-1 [[김삼락#감독 경력|{{{#ffffff ''' 김삼락호 ''' }}}]] }}} || U-20의 업적으로 1980년대에는 히딩크 못지 않은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그 이후의 대표팀에서 활약상은 딱히 없었다. 박종환은 U-20의 업적으로 여러번 국대팀 지휘를 맡았는데, 당시에는 전임감독제가 아니라 대회마다 소속팀 감독을 겸임하며 국대 감독을 맡는 방식이었다. 쉽게 말하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나가는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감독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1984~85년, 1986~1988년, 1990년, 1996년 각각 국가대표팀을 맡았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렇게 수차례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나, 월드컵 대표팀은 끝내 맡지 못했다. 박종환 본인은 인터뷰에서 꼭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겠다는 다짐을 여려차례 했지만, 워낙 독불장군인 성격 탓에 협회와 축구인은 물론이고 지도하는 선수들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선뜻 대표팀을 맡길 리가 없었다. 심지어 월드컵을 앞두고 전초전 성격으로 맡은 대표팀에서 불협화음이 나오거나 결정적인 순간 성적을 내지 못하고 좌절했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여론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1980년대 중반부터 대표팀이 죽을 쑤기만 하면 지금 감독을 자르고 박종환 감독을 앉히라는 성화가 들끓었다. 1983년의 후광이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1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U-20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라간 것은 히딩크 전까지 한국 국대팀의 최상 커리어였으며, 그는 대중들에게 '''명장'''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국가대표팀을 여러차례 맡았고, 현재까지도 올림픽팀 포함해 '''국가대표 감독을 5차례'''나 맡은 박종환보다 더 많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사람은 없다. 그의 열성팬 중 한 사람이 축구광이었던 [[전두환]]이었는데, 그가 국대감독을 지휘할 때 청와대에서 TV 중계를 지켜보다 휴식시간에 전화해서 작전지시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거짓말 같지만 박종환 본인이 확인해 준 일화이다. 전두환과 박종환이 이렇게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인지, 퇴임 이후에도 박종환과 그 친구인 [[이주일]]을 불러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주일의 5공 초반에 출연금지[* 이주일의 대머리가 전두환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를 사과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축구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 세대를 불문하고, 1983년의 업적은 당시를 지냈던 모든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를 성남 FC로 영입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도 마찬가지인데, 야권 성향의 인권변호사 출신인 이시장은 전두환과 정치적 성향은 거의 반대되지만, 그럼에도 대구FC이후 초야에 묻혀있던 박종환을 삼고초려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대표팀에서는 불명예 퇴진이 반복되었다. 1983년 청소년 대표팀의 호성적에 힘입어 1984년 LA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맡았으나, 역시 강압적인 지도 방식이 문제가 되어 [[최순호]], [[최인영]], [[이태호(축구)|이태호]], [[변병주]], [[박경훈]] 다섯명이 [[태릉선수촌]]을 무단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하다못해 [[듣보잡]]도 아니고 대표팀 핵심 멤버들이라 파장은 더욱 심각했다. 선수들도 줄빠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인데도, 공개적으로 항명하면서 팀을 이탈할 정도였으니 박종환 감독의 지도가 얼마나 강압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당시 정서상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축구협회는 이들에게 '''3년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긴 하지만, 이때부터 대중들 사이에 박종환은 '''불통의 아이콘'''이란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징계를 받은 5명은 사실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중추였기 때문에 슬그머니 출전정지 처분은 해제되고 대부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그대로 나간다. 그리고 이런 우여곡절끝에 맞이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사우디전 편파 판정으로 억울하게 4대5로 패하고[* 심판이 대 놓고 사우디 편파 판정. 당시 피파 부회장이 쿠웨이트 왕자로 당시 중동 국가 이기는 것은 한국 홈에서 조차 1골 도둑 맞고, 1골 공짜로 주는 시절이다.], 플레이오프[* 당시 아시아 최종 예선은 두 조로 나누어 실시했으며, 본선 진출권은 세 팀에 주어졌다. 조 1위 두 팀은 본선 진출, 조 2위 두 팀이 맞붙어서 승자 한 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 한국은 사우디에 패하면서 조 2위가 됐다. 당시 본선 막차를 탄 이라크가 [[이란-이라크 전쟁|전쟁]] 때문에 불참하면 이라크 대신 본선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당시 있었으나 이라크는 전쟁 중임에도 참가했다.]인 이라크전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1:0패배.. 이때도 선수들이 후반에 태업이라고 보일 정도로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박감독은 직전의 사우디전에서 체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탓이라고 해명했다. 이후 1985년까지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이해 열린 고베 유니버시아드에서 5위로 마감하여 사퇴한다. 여담으로 이 당시 박종환 자체가 워낙 인기였고 박종환이 이끌던 올림픽 대표팀의 전력도 강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박종환의 올림픽 대표팀과 김정남의 국가대표팀중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한 설전이 있었고, 결국 두팀은 19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각각 참가하여 결국 결승에서 맞붙었다. 잠실주경기장에서는 3만 명의 팬들이 몰렸고, 김정남 감독은 형이 '질수는 없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박종환 감독 역시 '져줄수는 없다'며 경기전 부터 장외 신경전을 펼쳤다.[* 그밖에 김정남 감독은 아우에게 지는 형이 될 수 없다,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88팀의 10가지 작전을 붕괴시키고 승리하겠다'고 말했고, 박종환 감독은 '우리가 체력이 우세하다. 3년 동안 손발을 맞춰온 조직력으로 개인기를 압도할 수 있다'응수 했다]. 결국 경기에서 국가대표가 올림픽 대표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으나, 올림픽 대표팀은 대등하거나 오히려 앞서는 경기 내용을 보여 오히려 박종환 감독이 국가대표팀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져줬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었다. 1986~1988년에는 임시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올림픽 직전에 평가전겸으로 열린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대통령배 축구대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생겼기 때문에 팍스컵이라고 해외에 알려져 있었다. 1990년대는 코리아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99년 이후 폐지되었다. 한국팀이 두팀(대표팀, 올림픽팀) 출전하고 해외 대표팀이나 클럽팀을 초청하여 A,B조로 나뉘어 예선전을 벌인 후, 준결승-결승으로 열리는 경기였다. 2000년대 생겼다 폐지된 [[피스컵]]과 형식이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월드컵 진출이 어려웠던 1960~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나라가 개최하는 대통령배와 동남아에서 열리는 [[킹스컵]] 그리고 [[메르데카컵]]이 거의 세계 3대 축구대회 수준이었다. 어디까지나 국내 축구팬들에게는... [[차범근]], [[허정무]], [[조광래]] 이상 축구인들에게는 이 3대 대회에서 피터지게 싸웠다는 회고담을 쉽게 들을 수 있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패하고 결승 진출에 실패하자[* 유럽의 강호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결승에 못오른 건 이 대회가 생긴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대회는 한국팀에 유리한 극심한 편파판정으로 국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대우]] 회장이 이끌던 [[대한축구협회|축협]] 지도부와 마찰을 빚고 1988년 7월 사임했다. 이때도 대표팀에서 매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박종환은 이 경기후에 "(소련, 체코, 유고와 같은)동유럽팀 별거 아니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서 빈축을 샀다. 아래도 나오지만 이후에도 올림픽 우승 감독인 비쇼베츠를 "동유럽은 축구 선진국이 아니다"는 식으로 디스하기도 했다.] 1990년에도 8월에 이차만[* [[이회택]]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전 전패로 사임한 이후 2개월간 감독을 맡았다] 감독대행 후임으로 대표팀 감독을 맡아서 1990년 남북 친선축구경기의 감독으로 방북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패해 금메달획득에 실패하며 [[동메달]]에 그치자 잘렸다. 카리스마가 강해서 스타 선수들이 찍소리도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국가대표팀을 맡자마자 한 일이 머리를 기르던 [[김주성(축구)|김주성]] 선수에게 머리를 짧게 깎도록 지시한 일이었는데, 개성 강한 김주성이 그 포스에 쫄아서 바로 머리를 깎고 훈련에 합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프로가 정착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런 지도는 많은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