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일생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육군]] 장교 시절 == 1946년 9월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전체 3등의 성적으로 2기로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는다. 군번은 10166. 복무 도중에 셋째 형이자 공산주의자였던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은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러던 중 우익에게 피살된 형 박상희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갈 때,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 사건|황태성]]이 신원 보증을 서줬다.[*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을 정도로,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1946년 10월 황태성은 박상희와 함께 대구 10.1사건을 주동하다가 결국 월북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북한은 밀사(혹은 간첩)로서 '황태성'을 보내어 1961년 8월에 황태성은 다시 남하한다. 그러나 1961년 12월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박정희는 황태성을 살리고자 했지만, 박정희가 미국과 야당의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라 결국 1963년 12월 14일 황태성은 사형 선고를 받고 재심청구했지만, 인천 근교의 군부대에서 총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황태성 사건]] 참조.]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아동교육학과 1학년이었던 [[이현란]](당시 24살)과 처음 만난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처지였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약혼한 후 [[서울]] [[용산구|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 동거를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3년 정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1948년 11월 중순~12월 말 사이 이현란은 광화문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약 6개월 뒤 아들은 병명도 모른 채 사망했고, [[이현란]]이 남긴 편지에 따르면, 이현란은 저녁에 황 장군 부인하고 같이 용산 관사의 뒷산에다가 아이의 시신을 붉은 상자에 입관하여 암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는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과 연루되면서 감옥에 있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80664|아들은 작명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창룡 소령이 차트를 펼쳐 보였다. 남로당 군사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다.(중략)[[박원석(군인)|박원석]] 대위는 맨 끝에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바로 그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116p)[br][br][[박원석(군인)|박원석]]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위가 바로 박정희 소령이라 하니 더욱 더 황당한 일이었다.(중략)그래서 김창룡에게 물었다. "박원석 대위가 박정희 소령의 세포라고 하는데,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는 빨갱이인 것이 확실합니다." 김창룡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118p)[br][br](중략)김창룡이 간 뒤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이 내게 “[[김창룡(군인)|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한 가닥 실마리가 풀려가는 소리였다.(중략)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10번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 소령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10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21p) >---- >[[김정렬(1917)|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소령의 고난 p.116-121의 일부[[http://dlps.nanet.go.kr/DlibViewer.do?cn=MONO1199320392&sysid=nhn|(원문)]][[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207|(발췌)]] 1948년 11월 11일,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 도중에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연루돼 박정희가 체포되는데, 우선 [[남로당]] 군총책 이재복이 '거동수상자'로 잡혔다. 이재복에 이어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가 급진되는데, 수사팀은 연락책 김영식을 통해 명단을 얻게 된다. 이 명단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되어있었다. 결국 11월 11일 박정희는 체포된다. 같은 [[만주국]] 출신이자 당시 육본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상관 [[백선엽]] 대령[* '여순가담자 토벌'에 참여했던 [[송석하]]의 증언에 따르면 원용덕이 박정희를 붙잡아 '살려면 남로당 조직표 내놔라'라고 설득해서 서약을 받은 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207|백선엽에게 구명요청을 했다고 한다]].]과 [[정일권]], [[김정렬(1917)|김정렬]], [[장도영]], [[원용덕]], [[채병덕]], [[강문봉]], [[송요찬]] 등의 육군군관학교 출신 군인들의 구명으로, 처벌을 면하고 예편되었으며 전향하게 된다.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제공하고 그 공로로 숙군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13일 1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 동거녀(약혼녀)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었고 아들마저 죽자 박정희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김호남|아내]]와 [[박재옥|딸내미]]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이현란에게 들통났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무기징역 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다만, 박정희만 특별 대우를 받아 사면된 것은 아니고,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이 혐의자들과 일일이 개별 면담한 뒤 상당수를 군문을 나가는 조건으로 [[훈방]] 조치했다고 한다. 당시 김창룡의 숙군작업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피해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군대 고위층이 최대한 구제하는 방침을 세우면서, 박정희도 같이 살아났다. 이후 박정희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백선엽의 추천으로,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인 [[대한민국 군무원|군속]](군무원)으로 육군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훗날 자신의 쿠데타 주축 세력이 되는 육군 8기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중에서 8기 우등 졸업으로 정보과에 배속된 [[김종필]]과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이후락]] 역시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전투정보과에 근무하던 6·25 남침 6개월 전인 49년 12월 육본 정보국은 ‘연말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작성했다. 북한 남침 준비상황을 소상히 파악해 아군의 대책을 건의한 방대한 보고서였다. 작성을 지시·주도한 건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문관(文官)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 종합적인 적정보고서를 만들자”고 의견을 냈고, 종합판단을 하였는데 요점은 "적(敵)이 1950년 3월에 공격해올 것이 확실하다. 다만 중국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했던 동북 한인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이 늦어진다면 침략 시점은 6월로 연기될 것이다. 동두천·의정부·서울 선에 전차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 이상이 주공(主攻)을 지향할 것이다. 또 개성·파주·서울 선과 춘천·원주·평택 선엔 각각 1, 2개 사단이 조공(助攻)을 하게 된다. 함경북도에서 훈련 중인 유격 전문부대인 766부대는 배를 타고 후방에 투입될 것이다. 적은 2, 3개월 이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 전 병력을 일제히 투입할 텐데 총 병력은 최초 단계에서 약 12만, 서울 이남 공격 단계에선 20만으로 예상한다. 적의 전차부대는 아군에 결정적인 위협이 될 것이고 항공기는 지상군 엄호(掩護)를 주 임무로 삼을 것이다. 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으나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수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091584|6·25 반년 전 박정희 “늦어도 6월엔 북한군 남침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귀하였고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광역시|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박정희가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에 연루되고 아들이 죽은 이후, 약혼녀 [[이현란]]은 여러 차례의 가출과 방황을 했고, 박정희는 그때마다 찾으러 다니고는 했다. 1950년 2월, 결국 [[이현란]]과 헤어졌다. [[6.25 전쟁]] 발발 이후였던, 8월 하순 [[부산]] 피난처에서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다. 같은 해 11월, 아내 [[김호남]]과 협의 이혼으로 갈라섰다.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허억 시장(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육영수]] 여사와 재혼한다.[* 허억은 당시 신랑, 신부를 만난 적이 없었기에, 주례사를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으로 시작하는 바람에 하객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B_IMG_1474744666424.jpg|width=100%]]}}}|| || 1950년 12월, [[계산성당]]에서 진행된 박정희-[[육영수]]의 결혼사진. || 1952년 5월 이용문의 주도로 계획된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서, 이용문의 보좌관이었던 박정희 역시 정변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계획은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 1953년 11월 25일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됐고 1955년 7월 14일에는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는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제7사단 사단장으로 다시 부임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ark_chung_hee.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정희 부군단장.jpg|width=100%]]}}}|| ||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시절의 박정희 준장 ||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 준장 || 1959년 3월에는 [[소장(계급)|소장]] 진급자 명단에 올랐을 때 과거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은 진급 담당자들[* 그중에는 [[곽영주]] [[경무관]]도 있었다. [[이승만]]에게 충성하고자 했던 곽영주가 박정희 대령의 과거 전력을 문제 삼았던 것. 이때 곽영주 경무관이 좀 더 유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5.16 이후 열린 재판에서 구명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라 보는 군 원로도 있다.]이 [[백선엽]]에게 항의하였지만, 그는 "박 장군에 대해선 내가 보장한다."며 박정희가 진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3년 대령에서 준장 진급 시에도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도움을 받았다.] 이 덕분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백선엽을 "백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백선엽은 예편 후 대만(자유중국) 대사를 시작으로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지휘하게 하였다.] 소장 계급으로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군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1960년 1월 21일 [[육군군수사령부|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며 군내 요직을 거쳤다. [[4.19 혁명]]으로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1955년)|민주당]]이 집권하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고 [[이종찬]]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면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이 문제를 [[미 육군]] 제8군사령관 겸 UN군총사령관 육군[[대장(계급)|대장]]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와 논의하면서, 박정희의 신원을 육본을 통해 조회했고 [[김형일(1923)|김형일]]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면서 매그루터는 장면 총리를 찾아가 항의했다. 결국 1960년 12월 15일 박정희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당시 2군 사령관이 [[장도영]]이었는데 박정희가 예편당할 처지에 놓이자 그를 부사령관으로 도운것이었다.] 이 일로 당시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 여순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판사의 증언에 따르면 백선엽 국장과 마찬가지로 김형일, [[송요찬]]은 박정희가 여순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 구명활동을 요청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었다. 당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판사는 "백선엽 국장 이외에도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았던 송요찬 장군과 김형일 장군 등도 그의 구명을 요청해 왔다"고 밝히면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207|"당시 박정희는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난 것이 없었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데다 머리좋은 수재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회고했다]].]은 박정희와 원수 사이가 됐고, 이후 5.16 군정에도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됐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박정희는 이전 상관이었던 이용문처럼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기념으로 학생들이 대규모 집회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때 혼란을 틈타 집회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