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원식 (문단 편집) == 홍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 == ||||<:>[[파일:박원식.jpg|width=300px]] || || 성명 ||박원식(朴源植) || || 생몰 ||[[1893년]] [[8월 6일]] ~ [[1955년]] [[10월 20일]] || || [[출생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박원식은 1893년 8월 6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졸업 후 조치원청년회 회장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1 운동]] 때는 홍천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3.1 운동 직후에는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제2회 독립만세 시위계획에 참가하였다.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상황에서 [[전협]]·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먼저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민족사회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을 구상했다. 또한 그들은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계획·추진하는 한편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 때 박원식은 조선민족대동단의 단원으로 만세시위 계획의 실무를 맡았다. 그는 [[나창헌]]·[[안교일]]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으며, 거사 당일에 만세시위를 선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거사 당일날 운동원간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 못하였는데, 이에 그는 [[이신애(독립운동가)|이신애]]·정규식(鄭奎植)[*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정규식]]과 동명이인이다.] 등과 함께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1월 28일 안국동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와 '조선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조선일보 홍성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과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광천노동조합(廣川勞動組合)과 광천청년회·광천소년회 등의 조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930년 2월 홍성에서도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의해 탐지되면서 10여 명의 학생이 붙잡혔을 때, 그는 일경의 무리한 언사와 탄압에 항의하다가 일경의 불법적 직권남용에 의해 소위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구류 25일을 받았다. 한편 그는 1930년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했다.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5년 10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원식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홍성군 출신 인물]][[분류:1893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