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영규(배우) (문단 편집) == 생애 == 1953년 [[충청남도]] 대전시(현 [[대전광역시]] [[중구(대전광역시)|중구]])에서 태어난 그는 중고등학생 때 [[수학여행]]도 불참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15살에 [[신문]]을 돌리다가 [[불도그|불독]]에게 물린 뒤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학교 담임의 “넌 훌륭해질 거라고 선생님은 믿는다.”란 말을 듣고 용기를 냈다고 한다. 막연히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전혀 그 쪽으로 인연이 없었고, 형편이 어려워 충남기계공고를 가야 했다. 기름밥 먹는 생활과 맞지 않았던 그는 고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결국은 서울예전에 1972학번으로 합격했다. 면접관이 바로 연출가 오태석[* [[1940년]] [[10월 11일]] 생.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으로, 서울예대 교수이며, 극단 목화를 이끌고 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했고, 1967년 웨딩드레스를 시작으로 수백 편의 [[연극]]들을 연출했다. 2005년 호암상, 2012년 동아 연극대상을 수상했다.]이었다. 1976년 포병으로 입대했고, 제대 후인 1980년 본격적으로 대학로에서 극단 생활을 하게 된다. <공간사랑>이란 곳이었는데, 대학 은사 오태석의 작품인 <1980년 5월>로 연기를 시작했다. 곧 오태석이 <극단 목화>를 창단하면서 창단 멤버에 이름을 올린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소품을 정리하는 역할로 시작해 연극 배우로 총 7년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를 회상한 그는 회식 자리가 있으면 오태석의 가방을 맡아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겸사겸사 그 날 연기에 대해서나 연기 철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화여대 정문 옆 철길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고... 그 때 룸메이트들이 현재 <극단 76단>을 이끌고 있는 [[기국서]]&[[기주봉]] 형제였다. 그러나 극단 생활이 흔히 그러듯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렸고, 심지어 도중에 [[폐결핵]]까지 걸렸다. 29세(1981년) 9월 그가 [[묘청]] 역을 맡았을 때 체중이 42kg까지 줄고 무대에서 기절도 했다고 한다. 잘 먹어야 할 병에 그러지도 못해 사람 얼굴이 아닐 정도가 됐다. 대전 어머니까지 상경해 간호를 하느라 집도 [[역촌동]]으로 옮겼다. 병원비를 댈 수가 없어 아픈 몸에 손수 책 외판원에 나서야 했다. 극단은 2년의 투병 기간동안 쉬었지만, 외판원으로 매상을 꽤 올려 복귀 직전엔 영업부장까지 맡았다.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직접 엉덩이에 주사도 놓고, 모친은 약탕원에서 몸에 좋다는 것들을 고아다 먹였다. 훗날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인임을 연기했을 때 말년에 폐결핵에 걸리는 장면에서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면서 연기했었다고 한다.[* 당시 전통적으로 권장되던 [[개고기]]나 뱀, 개구리같은 고단백 보양식을 먹고 가까스로 회복을 할 수 있었다. 훗날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자신이 맡은 배역인 [[이인임]]이 결핵을 앓는 설정이 있으며 보신에 좋다고 개고기를 먹고 자란 [[구더기]]를 한 움큼 먹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곤 묘청 역을 맡은 '자1112년'에서 만난 대학 후배와 1983년에 [[결혼]]했다. 폐결핵을 앓아 힘든 그를 간호까지 해가며 2년 열애 끝에 결국 결혼했다. 처가의 반대가 심했고 워낙 가진 것이 없어 자취방에 비닐 장롱 하나 놓고 신접 살림을 시작했다. 그 해에 드디어 아들을 얻는다. 그가 말하길 처가 어른들이 월남하신 분들이었는데 마음을 풀지 않으셔서, 나중에 애를 안고 찾아갔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 1983년 가정 생활로 건강을 조금씩 되찾으면서 연극 한만선(韓滿線)으로 복귀했고, 1985년 MBC 베스트 극장 <초록빛 모자>[* 1985년 1월 6일에 방영]에 [[서갑숙]]과 부부 역을 맡아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있는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인기를 얻고 나서도 서갑숙을 그의 진짜 부인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86년 [[MBC]]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면서 연극판은 떠난다. 그러다 1988년 '''MBC 주말 드라마 [[내일 잊으리]]에서 야망에 불타는 애인에게 배신당한 [[김희애]]를 묵묵하게 지켜주는 따뜻한 이미지로 대히트를 쳤다'''. 준수한 외모와 신사적인 이미지에 노래 실력까지 겸비해서 1989년에는 앨범 [[카멜레온(동음이의어)#s-3.1|카멜레온]]을 발표, 하루 12개의 행사에 출연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 가수 [[김종찬(가수)|김종찬]]과 더불어 주부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연예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9년 9월엔 MBC 수목 미니시리즈 [[당신의 축배]]에서 [[최진실]]과 로맨스 연기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그 뒤로 후속작이 터지질 않아 약 8년 가까이 침체기를 겪었다.[* 침체기의 원인은 곧 40대에 접어드는 나이와 점점 빠지는 머리숱에도 있었다. 더이상 로맨티스트로서 극에 서기가 어렵게 됐던 것이다. 1989년 [[토토즐]]에서 카멜레온을 부르는 영상을 보면, 되도록 숱이 많이 남은 오른쪽을 보여주려 계속 카메라 각을 잡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훗날 가발 업체 밀란의 브랜드 모델로 장기간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1994년 브라운관을 떠나 연극판으로 돌아온다. 은사 오태석이 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모노 드라마였다. 온전히 그의 연기력으로만 1인극을 끌고가는 거였는데, 극단 목화가 대학로 흥사단 빌딩 지하에 상설 극장을 마련하면서 그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상설 극장 이름은 <충돌극장2>라는 이름이었다. 1997년에 폐관했다. 돈과 인기도 생기고 경제적 사정도 나아졌지만, 부부 관계의 위기를 겪었다. 1996년에 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곧 [[이혼]]했고, 이듬해 3살 연상의 디자이너 최경숙과 [[재혼]]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다시 한 번 전환기를 맞는다. 침체기에 있던 그를 다시 끄집어낸 작품이 바로 1998년 3월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였다. '''순풍산부인과 [[박미달|미달이]] 아빠 '''[[박영규(순풍산부인과)|박영규]]''' 역할을 맡은 뒤로는 얍삽하고 이기적이며 민폐를 잘 끼치면서도 밉지 않은 [[개그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원래 미달이 아빠는 박영규가 아니고 또래 배우 [[이덕화]]에게 먼저 제의가 들어왔었는데, 그 당시에는 코믹한 연기를 해야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데다 다른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땅을 치면서 엄청나게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덕화가 미달이 아빠 배역을 거절하고 들어간 작품이 SBS의 경찰특공대와 여인천하였는데, 그래도 둘 다 대박을 기록하긴 했다.]. 특히 [[이불킥]]하는 연기가 일품. 순풍산부인과에 출연 중이던 1999년 가을에는 [[MBC]] 드라마 [[국희]]에서 친구 민영재를 배신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암살까지 시키는 등의 온갖 악행들을 벌이는 [[악역]] 송주태를 맡았는데,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밤 9시 15분에는 SBS에서 코믹한 사고뭉치 사위로 나오는 걸 본 뒤 바로 9시 55분에 MBC로 채널을 돌리면 사악하고 냉혈한 악역으로 변신하는 박영규를 볼 수 있었다. 또한 [[국희]]가 종영하고 드라마 [[신 귀공자]]가 방영하는 동안,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밤에도 바로 9시 55분에 MBC로 채널을 돌리면 진지하고 엄한 키다리아저씨 이미지의 선역으로 변신하는 박영규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순풍산부인과에서의 코믹한 모습만 알던 어린 [[시청자]]들이 국희에서의 악역과 신귀공자에서의 선역을 보고 박영규의 연기력에 감탄했다고도 한다. 다만 미달이 아빠의 코믹스러운 이미지가 워낙 히트를 쳤다. 사실 그 동안 이미지 전환을 여러 번 시도했었다. 1995년 작인 [[옥이 이모]]에서도 개그 연기를 했었는데[* 옥이 이모가 중년이 된 이후 시점인 방영 후반 등장], 옥이 이모에게 잘보이려고 노래방에서 팝송을 부르려다 영어 가사를 몰라, "징글벨 징글벨 징글징글벨~ 징글징글징글징글 징글징글징글징글 징글징글벨"이라고(살짝 촐싹맞았다.) 부르는 코믹씬이었다. 물론 진짜 박영규는 원래 팝송을 좋아해 옛날 가요 방송에서 올드 팝송을 유창하게 부른 적도 있고 1989년 앨범에 팝송 마이웨이도 들어있다. 영화 역시 1999년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찌질한 사장을 시작으로 2002년 [[라이터를 켜라]]에서 찌질한 [[대한민국 국회의원]] 역을 맡았다. 2001년, 두 번째 결혼도 끝이 났다. 암투병을 하던 아내가 '건강할 때도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자신이 없다. 마음 편히 투병하고 싶다. 당신도 편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하며 이혼을 선언한 것이다. 아픔을 딛고 MBC, KBS, SBS 대작들에 여럿 출연하면서 아랑곳 않고 연기에 몰두했다. 2000년작 [[신 귀공자]]에서 재벌집 막내 삼촌 역을 맡아 여주인공 [[최지우]]를 뒤에서 돕는 [[키다리 아저씨]] 이미지로 대호평을 받았다. 아울러 미달이 아빠 이미지로 [[똑바로 살아라(드라마)|똑바로 살아라]] 등 시트콤에 연이어 출연해 전성기를 이어갔다. 압권은 드라마 '다모'의 좌포청 포도대장 조세욱 역을 맡아 역모로 걸린 친구를 두고 고뇌하는 씬이었다. 당시 다모 폐인들에게 압권이었다 평가받았다. 그의 노래대로 카멜레온 같은 변이 성공을 거듭했다. 그런데 2004년 3월, [[미국]]에서 아들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대륙횡단 여행을 떠났다가 메릴랜드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박영규는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들 사고 이전에 계약했던 [[해신(드라마)|해신]]은 마무리하고 떠났다. 설평 역으로 작품에서의 주인공 [[최수종]]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써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사고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연기력은 프로페셔널했다. 그리고는 방송 스케줄을 모두 정리해 [[캐나다]]로 훌쩍 떠났기에 2009년까지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2004년 친구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김수륜[* 김수륜은 한국 레이컴 회장인 정호영의 전처다. 정호영은 [[심은하]]와 약혼했다가 파혼한 경력이 있고, 후에 [[이영애]]와 결혼했다.]과 이듬해 세번째 결혼을 한 뒤로도 한동안 캐나다에 있었다. 2009년부터 복귀를 모색했다. 가발업체 [[밀란]]과 계약해 광고 모델로 컴백한 그는 영화에서 그에게 성공을 안겨줬던 <주유소 습격 사건>의 후속작을 두고 제작비를 직접 대는 등 의욕적이었다. 자꾸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우 [[이광기]]가 아들을 신종플루로 7살 나이에 [[참척|하늘로 보내면서]] 그것을 보고는 동병상련의 아픔 때문에 울었다고 한다. 2010년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2]]로 5년만에 복귀하면서 [[무릎팍도사]]에도 영화 홍보차 출연했다. 당시 [[강호동]]에게 안겨 코믹하게 등장한 그는 그렇지만 그 때의 아픔에 대해 말할 때 오열하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으며 속죄하는 심정 뿐이었다고 한다. 미달이 아빠로만 기억하던 시청자들을 가슴 먹먹하게 했다. 2013년엔 MBC 일일극 [[오로라 공주(드라마)|오로라 공주]]에 출연했다가, 갑자기 드라마에서 사라져 버렸다. 해당 드라마의 작가인 [[임성한]]의 횡포에 의해 전격 하차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마음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이건 명백히 [[임성한]]의 잘못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제 아무리 본인이 드라마의 작가라고 할지라도 단지 배우와 불화가 있다는 이유로 주연급 배우를 갑작스럽게 하차시켜버린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은 행동이다. 더구나 임성한이 아무리 대단한 작가라도 박영규는 임성한보다도 커리어가 오래되고 나이도 더 많은 배테랑 중견 배우이다. 커리어로도 나이로도 박영규가 훨씬 위인데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봐도 임성한이 개념이 없는 것이다.] 2014년 [[KBS 1TV]] 사극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이인임(정도전)|이인임]] 역할을 맡았다. 당시 [[정현민]] 작가는[* 작가뿐만 아니라 같이 출연한 배우들도 박영규의 코믹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대본 리딩 전까지는 우려가 많았다고 밝혔다.] 박영규의 코믹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반대했다. 그러나 베테랑 강병택 PD[* 용의 눈물 당시 막내 PD로 커리어를 시작. 거기에 박영규가 출연했던 해신의 연출을 맡기도 했었다.]는 박영규의 사극 연기를 알고 있었고 작가에게 여러 작품을 보여줬다. 이인임은 입체적인 악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인 악역인 데다 명연기까지 더해지니, 드라마 초반부를 책임졌다. 드라마 제목이 <승암 이인임>이 아니냐란 평까지 들을 정도였다. 2014 [[KBS 연기대상]]에서 장편 드라마 부문 [[http://goo.gl/zyg37H|남자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수상의 기쁨, 먼저 떠나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밝혔으며, 하늘에 있는 아들이 듣기 바란다며 오페라 축배의 노래를 한 소절[*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를 부른 후, 자신처럼 자식을 잃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며 드라마 못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81&aid=0002504070|기사]]. 2019년 KBS 2TV 주말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에서 한량 아빠 역을 맡았으며, 이듬해 1월 15일 개봉작 [[해치지않아(영화)]]에서 동물원 원장 역을 맡았다. 2019년 12월 25일, 네 번째 결혼이 <더팩트>지 단독보도로 알려진 것이다. 세 번째 이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며, 지인 30명 정도 초대한 극비리에 치러진 결혼식이었다. 상대는 미모의 일반인 여성으로만 보도됐다. 장소는 [[역삼동(강남구)|역삼동]] 라움아트센터라고 한다. 지인들만 초대된 스몰웨딩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