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노(가수) (문단 편집) === 성장 과정 === 본인 SNS에 올렸던 글을 토대로 성장과정이 꽤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노래]]와 [[작곡]]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의 곡을 작사하는 [[싱어송라이터]] 답게 SNS의 [[작문]]을 보아 꽤나 [[글솜씨]]가 있는 듯하다. 아래는 SNS에 직접 작성한 원문. >1. > > > 1990년 8월 30일.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길 바라던, > 또는 태어난 사실조차 몰랐을 수도 있던 불운의 내가 태어났다. > 수녀원에서 공부하던 친모는 신부(천주교)에 의해 미혼모가 되었다고 했다. > 온 몸에서 육수같은 땀이 흘러내리던 그 무더운 여름날, > 갓난 아기였던 나를 등에 업은 채로 포천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며 > 그렇게 악착 같이 버티려는 친모의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그러다 그 포천의 식당 주방에서 일하던 이모부와 안면이 텄다고 했다. > 당시 그저 같은 식당 직원이었고 그 이상, 이하의 감정도 없었다고 했던 이모부. > 하지만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를 업고 일하고 있는 나의 친모를 보며 참 안타까웠다고 하셨다. > 등에 업힌 아이는 통통하던 보통의 갓난아기들과 달리 많이 말라있었다고 >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내 앞에서 그렇게 눈물을 훔치시더라. >“그래서 니가 이렇게 지금도 마르고 살이 안찌는 체질이 된 것 같아 더 그 때가 생각난다.”며. > > 그리고 문득 새로운 일을 찾아 식당을 그만두고 서울 수유로 내려간 이모부. > 이상하게도 서울로 오면서 친모와 서로 공중전화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고 하더라. >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의 친모는 이모부를 찾아 서울로 달려왔고 > 그렇게 둘은 덜컥 내 바로 아랫동생인 여동생을 가졌다고 한다. > 1991년 가을, 아무것도 없는 빈 털털이 두 청년은 그렇게 새 삶을 꿈꾸며 충북 청주로 향했고, > 2년 전에 이미 결혼을 하고 청주에 자리잡았던 친모의 여동생은 자궁외 임신으로 한 번의 낙태를 겪었던 아픔과 > 언니의 안쓰러운 사정 때문인지 나를 친모대신 맡아 잘 키우겠다며 나를 데려갔다고 한다. > 포천과 수유를 거쳐 그렇게 떠돌던 내가 친모의 여동생인 지금의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덕에 > 청주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 > 짧은 시간에 이 모든 이야기를 상세히 할 순 없었겠지만 얼마 전 결혼을 한 > (당시 결혼을 앞둔) 여동생과 막내동생이 자리에 함께 앉아 술잔 기울이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 > 이모부의 이야기를 듣는데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 스쳤다. > >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내 정체성에 항상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살아야할까?’ > 지금은 이모가 된 친모에게 직접 내가 태어나게 된 과정과 그 후의 이야기들을 자세히 묻고 싶었다. > 그 알수없는 감정으로 만들어진 분노와 궁금증으로 가득하던 그 마음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생각이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버텼을까?’ > 나는 하나도 물어볼 수 없었다. > 벌써 30년이나 된 이야기지만 나의 질문이 그녀의 30년 전 악몽을 떠오르게 할까봐 꺼낼 수 없었다. 유년기부터 소아천식을 심하게 앓아 청주시내에서 외곽 청원군 지역으로 이사하여 굉장히 시골에서 지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졸업생이 16명이었다고.[* 실제로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들어 동네에 비로소 인터넷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전에는 학교의 컴퓨터실에서 온라인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시절 가출 등의 방황 등 순탄치 않게 유년 및 학창 시절을 보낸 듯 하다. 2009년, 서울로 대학교를 가게 되면서 스무살에 처음 상경하여, 주유소나 호프집, 노래방, 편의점 등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고. [* 서울에서 버티기 위해 악착같이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녀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공연에서 말한 바 있한다.]2011년 9월, [[논산훈련소]]로 입대하여 강원도 [[철원]]의 육군 3사단 [[백골부대]]에서 군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군생활 동안 작곡을 하는 군대 후임을 만난 덕분에 작곡의 개념과 기본을 터득하여 군시절에만 100여곡을 넘게 작곡하였다고 한다. [* 당시에 만들어 후에 발매된 곡으로는 양치기소년, 하기 싫어, 운다, 없던 것처럼 등이 있다.] 2013년 6월, 군복무를 마치고 병장 전역을 하였다. [* 군생활 도중 스마트폰 반입으로 인해 12일간 영창을 다녀와 전역일이 미루어졌다고 한다.] 2014년, 처음 경기도 시흥에 정착하여, 앨범 발매 자금을 위한 [[공장]] [[생산직]]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2015년 7월, 그룹 2S.MEAN ([[투에스민]])의 첫 디지털 싱글 앨범 《한여름 밤에》가 발매되었다. 2016년, 미스터노트라는 예명으로 현재 [[미노]](Mi-no)의 첫 싱글 《양치기소년(Kebee)》이 발매 되었으며, 그 후로 솔로 두 번째 싱글 《하기 싫어》 등 솔로 앨범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같은 해인 2016년 연말, 편곡비 먹튀 사건을 겪은 바 있다. 2018년, 데뷔 3년 반만에 솔로 첫 미니앨범 《[[성장통]](成長痛)》을 발매했다. 앨범발매와 동시에 [[유튜브 크리에이터|유튜버]] [[채널김철수]]의 영상에서 동성애자 커밍아웃[* 공식적이고 대대적인 커밍아웃은 아니었으나, 나름 영향력 있는 유튜버 채널김철수에 출연하여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였으며 당시 데뷔 4년차였는데, 활동 중이던 가수로서는 가요계에서 사실상 최초의 동성애자 커밍아웃이다.]을 하였다. 2019년, 처음으로 경쾌한 리듬의 댄스곡 "지금봤어"를 《LEE'Z》라는 이름의 싱글로 발매했다. 2020년, 유명 프로듀서 그룹 'Gusta'의 [With U] 프로젝트의 일환인 솔로 싱글 《사람에게》가 발매되었다. 같은 날, [[2S.MEAN]](투에스민)의 두 번째 싱글 《That's Not Love》가 발매되었다. 2020년 2월 29일, 코로나19사태로 인하여 세번째 음감회 "사람에게" 공연이 취소되었다. 2021년 9월 27일, 미노(Mi-no)의 아홉 번째 앨범이자 두 번째 EP 《술김에》발매에 앞서 선공개곡 "습관"을 기습 공개했다. 2021년 10월 6일, 미노(Mi-no)의 아홉 번째 앨범이자 두 번째 EP 《술김에》가 발매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