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서진) (문단 편집) == 번외: [[부여]]와 [[재조지은]] == >夫餘國 在玄菟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000리인데, 호([[戶]])는 80,000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 >《진서》 <동이전> 부여조[* 원문과 번역 출처: [[https://blog.naver.com/superman2208/220243399352|#]]] 이리저리 까이는 사마염이지만 의외의 면모가 존재하는데, 바로 한국사에 [[재조지은]]을 행했다는 점이다. [[부여]]가 모용선비부의 [[모용외]]에게 털리자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고 파면하고, 모용외로부터 부여를 구하여 나라를 회복시켰으며,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켰다. 자국에서의 암군이 한국에 [[재조지은]]을 행했다는 점에서 명 신종 [[만력제]]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