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국대학교 (문단 편집) == 역사 == >국선화랑도와 불교의 원만한 통합정신을 이어받아서 신라의 삼국통일의 힘을 그대로 계승해서 ‘햇빛 밝은 동쪽의 아침나라’라는 뜻으로 동국대학교라는 이름을 지녀 내려온 우리의 떳떳한 교육의 전당이여 > >언제나 이 민족 정의에 앞장서고, 의리와 투철하고, 엉터리 학문은 절대로 하지 않는 우리 동국대학교의 오랜 학풍을 우리는 믿나니, 무한히 계속될 이 민족사 속에서 모교여 늘 건재키만 하소서! >---- >미당 [[서정주]] - 동국대학교 100주년 기념 축시 中[* 어떻게 2006년에 건학 100주년을 맞은 학교의 축시를 2001년에 타계한 서정주가 지었는 지가 의문일 사람들이 있을 텐데, 사실 90주년이던 1996년에 미리 지어놓고 학교 본관의 금고에서 10년간 보관하다가 개교 100주년을 1주일 앞두고 공개된 것이다.][* 참 좋은 축시이지만 걸어 놓은 위치가 중앙도서관 로비 입구 위쪽인데 바로 앞쪽에 4층으로 통하는 거대한 계단이 있어서 일반 학생들은 있는 줄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런 축시가 있는지 아는 건 보통 문과대 교수님들의 언급을 통해서 알게 된다.][* 사실 1996년 시점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서정주]]의 친일, 독재 찬양 흑역사를 생각하면 떼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냐는 사람들도 많다. 학교도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그냥 조용히 묻어두는 듯하다. 물론, 그의 부끄러운 과거들을 망각하기보다는, 제대로 기록하고 교육하여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동시에 그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즉, 성취를 옹호하기 위해 친일, 독재 찬양을 미화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친일, 독재 찬양을 비판하기 위해 성취를 뭉개버릴 필요도 없이 양쪽 모두 인정하고 후대의 자양분으로 삼자는 것.] 1906년에 한민족의 전통문화의 계승ㆍ발전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설립한 '명진학교'가 그 기원이다.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학교, 1915년 중앙학림(中央學林)으로 개칭하였으며 1922년에는 [[3.1 운동]]을 주도한 것 때문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나 1924년에 다시 개교하였다. 그 후,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개칭한 뒤, 1946년엔 동국대학으로 승격, 1953년에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 동국대학교가 되었다. 동국대학교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1946년 9월 20일 혜화전문학교가 동국대학으로 승격될 때 교명으로 제시된 안 중에는 '고려', '동국', '조선'이 들어 있었다. 최종 결정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지만, 광복 전부터 국문과에서 교편을 잡으며 명강의로 인기가 높았던 무애 양주동 교수의 의견이 반영되어 ‘햇빛 밝은 동쪽의 아침 나라’라는 뜻을 담은 ‘동국’으로 교명이 채택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학교의 약칭은 모든 지역에서 동대(東大)이다. 개교 초기에는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와 더불어 '''서울의''' '''3대''' '''사학'''으로 불리며 상당한 입지를 쌓아두고 있는 학교였다. 사실 그 당시에 있던 서울지역 남녀공학사립학교는 세 학교가 전부였다.[* 당시 서울에 존재하는 사립학교는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명륜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숙명여자전문학교]] 그리고 혜화전문학교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시절 [[명륜전문학교]](現 [[성균관대학교]])와는 라이벌 관계여서 명륜-혜화정기전, 유불전 이라는 타이틀로 묶이곤 했었다.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간의 정기전이 현재 [[연고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접점이 없는 상황이다. 지금은 개교 초기의 위상에 미치지 못한다. 개교 초기 빠른 개교로 인지도 면에서 큰 이점을 누렸지만, 8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캠퍼스가 작은 편이었고, [[기숙사]]와 같은 필수적인 시설들도 2012년에야 완공되는 등 시설적인 면에서 부족한 면을 보였기 때문이다. 80년대 학내분규나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종단과 학교의 다툼도 작용했지만 80년대 학내분규 없던 학교는 손에 꼽으니 큰 이유는 못된다. 또한 시작이 [[불교]]만을 가르치는 불교학교였고 종합 사립대학교가 된 것은 1946년이었기 때문에, 개교는 빨랐지만 종합대학교 측면에서 학교 역사로 큰 우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면이 강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권상로]]가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한용운 외에도 국문학이나 문학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배출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 유서깊은 학과이던 독어독문학과가 폐지될 당시 큰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학제개편이 되고 말았다. 과거에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각종 학생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도맡았다. 동대생들은 선봉 중에서도 제일 앞 줄에 서서 경찰대형에 대항, 수도관을 굴리며 전진했다고 한다. 경찰 발포로 [[법학과]] 59학번 노희두 열사 외 여러 동문이 사망했다. 지금도 만해광장 뒷 편에 가면 [[4.19 혁명]] 때 산화하신 동문 선배들을 추모하는 동우탑이 있다. 2002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FTA를 반대하던 학생시위대들(서남총련 등)이 동국대를 점거하려고 몰려왔고 학교와 경찰 측은 캠퍼스를 철통 봉쇄해 버리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