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냉전 이후 ====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하고 소련 쪽 자료 공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소전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을 비롯한 서방 학자들은 동서독 역사학자들의 교류 중에서 유출된 소련의 내부 연구 자료들과 1, 2차 사료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존 에릭슨은 기념비적인 독소전쟁 3부작인 <소련군 최고사령부(Soviet High Command)>,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 해체|소련이 붕괴]]되고 문서 보관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독소전쟁 연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은 물론이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새로운 연구자들이 개방된 소련측 자료들을 대거 연구에 수용함에 따라 독소전쟁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띄었다. 글랜츠는 이 시기 조너선 하우스와의 공저를 통해 체계적인 독소전쟁 개괄서인 <거인들이 충돌했을 때(When Titans Clashed-국내 번역명 '독소전쟁사')>를 출판했다. 이후 글랜츠와 니입 부자(父子), [[스웨덴]]의 군사사학자 니콜라스 채터링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독소전 연구에 뛰어들어 명저들을 출판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강박증에서 풀려난 러시아 학자들 또한 갈수록 가치 있는 연구 성과들과 출판물들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데이비드 글란츠가 발굴한 "[[르제프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 공세는 글란츠의 저서 Zhukov's greatest defeat page(1999)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요약하면 1942년 11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은 사실 주공세가 아니었고, 실제 주 공세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 북쪽인 [[르제프]]에서 맡았던 "화성 작전"이었는데, 여기서 [[주코프]]가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영미권에서 화성 작전으로 대표되는 르제프 전역과, 그 동안 남부집단군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중부집단군의 전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화성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의 발이 묶여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를 지원할 수 없게 했다는 주코프의 일기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전이 글란츠의 말대로 꼭 실패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글란츠는 7년여 만에 발매된 러시아어 저서에서 부록으로 당시 소련군 군사 문서를 다량 수록하여 재반론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니콜라스 채터링이 발굴한 [[쿠르스크 전투#s-5.5|프로호프로카 전투]]의 손실 분석이다. 이 사람의 책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2000)에서는 소련 제5전차군이 [[무장친위대|SS 기갑사단]]과 격돌해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선전되었던 프로호프로카 전투에서 사실 소련군이 전술적으로는 대패했다는 것을 독일군 작전 일지를 분석하여 밝혔다.(독소의 손실 비는 약 1:6) 그러나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 기갑 부대는 그 전투에서 입은 손실 또는 지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이 전투가 전략적으로 소련의 승리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채 작전의 북부 방면을 담당한 독일 중부집단군과 [[오룔]] 탈환 전투인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서의 손실 또한 1:7에 가까웠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소련군의 문서들이 많이 공개되면서 기존 독일군에 편중되었던 시각이 사라지는 중이다. 특히 미군은 독소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완성된 '''소련군의 작전술을 본격적으로 본받고 배웠고''' [[걸프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류한수, “8월의 폭풍”에서 “사막의 폭풍”으로:냉전 시기 미육군의 소련군 작전술 이론의 연구와 수용 과정,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7년] 미군은 1982년 이전 까지만 해도 작전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야전군]], [[집단군]]을 통솔할 작전술이 부제한 상황이었고 거기다가 [[독일 국방군]] 출신 장교들이 서독군과 나토군에 대거 편입되면서 미군 장교 상당수들도 인종주의적 시각에도 편승해서 소련군을 무시하는 시각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과 [[제4차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장차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대규모 [[작전기동군|재래식 기갑 공세에 맞서서]] 대규모 야전 부대들을 통솔할 새로운 작전 개념이 필요했다.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소련군의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1985년, 소련군사연구소가 창설되는 것을 시작으로 미육군지휘참모대학의 고등군사연구원에서 소련군 군사 서적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1986년 판 야전근무 요무령에도 작전술이 본격적으로 명시되면서 미군은 소련군의 작전술 체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걸프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서방 전사가들이 편견 없이 소련군의 작전 체계들을 연구하고, 실제로 적용하는 행보에 대해 소련 측에서도 만족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다만 소련 시절과 달리 현재의 러시아군이 보급 및 통신, 전술 등의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반대로 작용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