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안군 (문단 편집) == 생애 == 1852년(철종 3년) 3월 18일 [[덕흥대원군]]의 11대손이자, 충정공 이홍술의 6대손인 이계(李烓)와 [[진사]] 김운순의 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왕족]]의 범위는, [[대군]] 후손의 경우 5대손까지, [[군(작위)|군]]의 후손은 4대손까지였다. 그런데 이재덕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중종(조선)|중종]]'''이기 때문에[* [[덕흥대원군]]은 [[중종(조선)|중종]]의 아들이다.] 덕안군이 태어날 때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1863년(철종 14년) 9월 [[철종(조선)|철종]]의 4촌 형 [[익평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하여 왕실 종친이 되었다.[* 원래 [[익평군|익평군 이희]]는 친아들 [[경은군 이재성]]이 있었으나 서자인데다 너무 어려서 새로 입양한 것이다.] 1867년(고종 4년) 3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창덕궁]] [[후원]]에서 [[소현세자]]와 [[인평대군]]의 자손들을 만나고 이 중 춘당대에서 유생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해 응하게 하여 시를 짓게 했다. 이를 응제시라 하는데 이 때 이재덕이 좋은 점수를 얻어 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상중이라 응시하지 못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4_04A_07A_00130|#]] 1871년(고종 8년) 1월 [[성균관]]에서 [[전주 이씨]] 출신 유생들의 응제시 때도 좋은 결과를 내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別試文科)[*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 제도|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그 해 5월 30일 [[홍문관]] 교리에 제수 되고, 이후 부사과(副司果)[* 조선시대 오위의 종 6품 관직.]를 거쳐 병조 정랑(兵曹正郞)[* 조선시대 병조에 둔 정 5품 관직으로 정원은 4명이다. 정랑은 [[육조]]의 실무를 관장하여 중요한 자리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이조 · 병조의 정랑은 좌랑(佐郞)과 함께 인사 행정을 담당하여 전랑(銓郞)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삼사(三司) 관직의 임명 동의권인 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 권한이 막강했으며 이에 대한 폐단이 일어났으니 그 유명한 [[붕당]]이다.]을 역임하였다. 1873년 홍문관 부수찬[* 조선시대 홍문관의 종 6품 관직.]을 거쳐 지평[* 조선 시대 사헌부의 정 5품 관직.]이 되었고, 1876년 홍문관 응교[* 조선시대 홍문관 · 예문관의 정4품 관직.]를 지내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