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지(소설) (문단 편집) === 3부 === 왕룽의 손자들, 그 중에서도 왕싼의 외아들 왕위안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왕위안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군벌 집단의 후계자로 꼽혔지만 그러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억지로 결혼할 위기까지 처하면서 결국 아버지의 다른 부인이 있는[* 왕싼은 첫 부인을 죽인 후 큰형과 작은형으로부터 한 명씩 여자를 소개받는데, 서로 자기 와이프가 추천하는 여자를 왕싼과 결혼시켰다. 이때 큰형이 소개해준 여자는 전형적인 신여성 스타일로 아이란이라는 외동딸을 하나 낳았고, 작은형이 소개해준 여자는 전형적인 시골 여성 스타일로(이가 검고 입냄새도 심할 정도로 그런 쪽에 신경을 안 쓰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이가 검은 색인건 콤플렉스여서 입을 가리고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여자가 왕위안의 생모다. 이 여자로부터 왕위안의 동복 여동생이 몇명 더 태어났으나 이복 여동생인 아이란에 비해 비중이 적다. 이름도 안 알려졌고 적당히 나이먹어서 시집갔다는 얘기만 나온다. 그리고 큰형이 소개해준 여자는 아들인 왕위안에게만 집착하는 왕싼에게 실망하여 혼자 외동딸을 잘 키워보겠다고 아이란을 데리고 상하이로 이주. 왕위안이 상하이로 간 후 왕위안의 친어머니같은 역할을 해준다.~~그리고 그 아이란은 춤추고 놀기만 하다가 속도위반 결혼까지 하면서 제대로 속을 썩이지~~] [[상하이]]로 이주해서 거기서 신식 교육을 받게 된다. 거기서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 유학을 가는 등의 스토리가 펼쳐지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가 후반의 줄거리. 이후 소설의 말기에서는 고향에서는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가의 기반이었던 농토를 모두 다 잃는다. 첫째 왕이의 집안은 아들 하나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은행의 부은행장이 되어 있어서 상하이로 이주하고[* 이 부은행장이 된 아들이 뚱뚱하고 미식가 스타일에 공처가 기믹도 살짝 보이는 등(...) 아버지와 완전히 닮았다. 사실 젊었을 때는 왕싼을 따라가서 군인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아버지가 거절했고, 이후 완전히 아버지 판박이가 된다.], 둘째 왕얼의 집안은 2부에서 삼촌 왕싼 밑에 들어간[* 믿을 만한 측근이 필요했던 왕싼이 두 형들에게 아들 하나씩 달라고 했다. 하지만 왕이가 보낸 아들은 군인이 되는 게 너무 무서워서 목을 매어 죽는다. 애초에 유약했고 학문을 좋아하던 스타일이라 무관과는 전혀 맞지 않았고, 이 아들이 죽은 후에 왕이의 부인이 '학자 기질이 있는 애를 왜 보내서 죽게 만드냐.'라고 왕이에게 화내는 장면이 있다.] 아들 곰보[* 그럭저럭 아버지를 닮은 상인의 기질로 스파이 등의 역할을 맡는데, 군대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해나가고 후엔 자신이 지배할 영토까지 할당받았다. 다만 완전히 군인이라기보다는 상인 기질이 강하다보니 상업도시의 관리자가 된 후에는 전형적인 배나온 문관 관리가 되어 후에 왕싼에게 '얘도 역시 군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놈이구만.'하고 까인다(...)]가 부유한 상업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도망간다. 문제는 셋째 왕싼인데, 왕싼은 도망간다는게 아버지의 옛집이었고, 당연히 들키는 바람에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그 후유증으로 앓다가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왕위안을 만나고 죽는다.[* 몸도 아팠고, 애지중지하던 명검을 농민들이 훔쳐가버린 것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얼마나 정신이 나갔냐면 메이링을 친딸 아이란으로 착각하고 내 딸이라고 불렀을 정도.] 애초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왕얼에게 있었다. 왕싼이 아들의 유학 자금이나 군자금 등으로 왕얼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그래도 학비나 군자금은 감당이 가능한 선이었지만, 결정타는 아들이 혁명세력에 가담했다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일이었다. 이 때 그를 빼내기 위해 엄청난 뇌물을 썼는데, 이것으로 인한 채무가 결정타가 되어 왕싼의 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었다.], 왕얼은 동생에게 가차 없이 이자와 대부 원금을 상환 받았다. 이 비용 부담 때문에 한때 2만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던 왕싼의 군대는 건달패 백여 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조카인 왕 얼의 아들조차 자기 지배구역에서 걷는 세금을 삼촌에게 바치지 않을 정도였다. 가문의 배경인 왕싼의 군대가 없어지자 왕얼의 착취를 참고 참던 농민들이 일시에 봉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벌의 보호를 받는 유력자들이 그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주면서 상부상조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왕얼은 결국 그 탐욕스러운 본성을 못 버려서 동생에게 자금 지원은 못 해 줄 망정 철저히 잇속만 따지다가 결국 화를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왕싼의 봉기 초기부터 보면 왕얼이 돈을 안 받고 넘어간 건 왕 싼이 늘어난 군대를 무장시킬 총을 구입했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사히 수령한 2천 정 정도에 대한 대금은 전부 받았고, 소실된 1천 정가량에 대한 대금만 왕싼이 못 받은 것에 대해선 지불할 수 없다고 배째라로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안 받고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사실 원칙을 따지면 총기 소실은 왕싼측 과실로 일어난 일이니 전액 지불이 맞고, '잃어버린 총 값은 못 내겠다'고 했다가 '손해는 반반 부담하자'고 요구한 왕싼의 주장이 억지이기는 하다. 하지만 폭력이 만연한 혼란기에 2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거느린 군벌의 보호는 돈을 바쳐서라도 받을만한 것이었고, 왕싼의 영역에 있는 다른 부자들은 왕얼처럼 왕싼과 거래를 하기는 커녕 아예 세금 명목으로 생 돈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평화로운 시기에는 말도 안되는 억지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그나마 받아들이는 것조차 행운이라는 점에서 왕얼-왕싼의 관계는 왕룽-숙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더 심하고 뻔뻔한 숙부의 행태를 끝까지 꾹 참은 왕룽은 죽을때까지 약탈을 당하지는 않은데 비해, 훨씬 신사적인 왕싼을 상대로도 과욕을 부린 왕얼은 스스로를 지킬 수단마저 상실하게 된 것.]. 한편 그 시기, 왕이의 두 아들은 혁명군에서 중책을 맡아 공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위안을 혁명군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의 군사학 가정교사는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 혁명 성공 후 위안이 자기 아래로 와서 일하길 바랬지만, 위안은 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참고로 위안은 할머니 오란을 많이 닮았다고 묘사된다.][* 다만 왕이의 막내아들은 지금의 혁명군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공산주의자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이의 자식들을 처음 만나기 전에 아이란이 대놓고 그런식으로 소개했었고.(왕위안은 꽤 자란 후에 상하이로 간 것이라서 사촌인 왕이의 자식들하고도 다 커서 처음 만난 것이다. 반대로 아이란은 아주 어릴때 이주했기에 그들을 여러번 본 것으로 보이고.)] 위안의 이복누이 아이란은 속도위반으로 부유하지만 여자 관련으로 소문이 좋지 않은 연애 소설가[* 이미 결혼도 한번 했었다. 정략결혼이었기에 마음이 없어서 결국 이혼. 아이란의 생모가 왕위안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굉장히 불행한 여자라고. 거기다가 아이란이 애를 낳는 장면에서의 표현을 보면 이 소설가는 전부인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자식도 두 명 이상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극중에서 상당히 잘나가는 소설가로 항상 주인공을 자살시키는 결말로 유명했다고(...) 다만 주인공을 자살시키는 결말이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닌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소개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개화기에 '연애'와 '자살'은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결혼했으며, 위안은 의붓동생 메이링과[* 중간에 한번 이어질뻔 했는데 왕위안이 조급해져서 다 말아먹는다. 메이링은 마지막 날에 데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왕위안이 조급한 나머지 자기 마음을 안 받아준다고 여겨서 그 날 따로 약속을 잡고 외출해버린것.]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3부가 종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