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목왕후 (문단 편집) == 생애 == 대목왕후는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소생의 딸로, '''광종과 이복 남매 지간'''이었다. 혜종과 정종은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호족들과의 정략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광종 및 다른 자식들에게서도 왕위 계승의 가능성을 보았던 왕건은 광종 이하의 자식들을 대부분 족내혼시켰다. 광종과 대목왕후의 혼인은 그 첫 사례이다. 광종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보았다. [[경종(고려)|경종]]과 효화태자(孝和太子),[* 기록에 대목왕후 소생의 차남이라는 것과 시호만 남아 있어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과 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 [[문덕황후]]를 낳았다. 천추전부인은 광종의 동생 [[문원대왕|문원대왕 왕정]][* 추증 사유 불명. 당시 광종은 왕보다 높은 황제를 자처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동생도 왕으로 높인 듯 하다. 다만 호칭만 그러할 뿐이지 조선 왕조의 국왕들처럼 어떤 통치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의 아들 천추전군과 혼인하였는데,[* 즉 사촌 간의 결혼이다. 당장 부모도 이복남매 관계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다(...).] 이름이 '아지(阿志)'라고 한다. 광종의 자식들 중 경종과 더불어 이름이 후대에까지 알려진 유이한 사람이다. 문덕왕후는 종친인 홍덕원군 왕규(弘德院君 王圭)와 혼인하였다가 뒤에 [[성종(고려)|성종]]과 재혼하였다. 참고로 성종은 대목왕후와 친남매인 [[대종(고려)|대종]]의 아들이었다. 즉, 대목왕후와 대종은 남매인 동시에 사돈이었던 것. 참고로 대종의 두 딸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도 광종과 대목왕후의 아들인 경종과 모두 결혼했기 때문에 겹사돈이기도 하다.(...)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달라 대립한 적도 있었다지만 아이가 다섯인 걸 보면 금슬은 제법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956년(광종 6년) [[노비안검법]]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많았으며 윗사람을 무시하는 기풍이 고려에 성행해 왕후가 왕에게 간절히 간하였는데도 왕이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대목왕후가 외가인 [[황주군]]의 대호족인 [[황보|황보씨]] 일가의 입장을 대변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후 대목왕후란 시호가 내려지고 광종의 사당에 합사되었다. 이후 목종(穆宗) 5년 4월에 안정(安靜)이라는 시호가 추상되었으며, 현종(顯宗) 5년 3월에는 선명(宣明), 현종(顯宗) 18년 4월에는 의정(懿正)과 신경(信敬), 문종(文宗) 10년 10월에는 공평(恭平), 고종(高宗) 40년 10월에는 정예(靜睿)라는 시호가 추상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