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만갑 (문단 편집) == 생애 == 1592년(선조 25) [[전라도]] [[나주시|나주목]](현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아버지 나급(羅級)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이(조선)|이이]]의 직계 제자인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김장생]][* 문인록에 올라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G&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238B_0480_010_0030|링크]]]과 [[이정구]]의 문인이기도 하다. 1602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22세 되던 1613년([[광해군]] 5) 증광시 진사시에 1등 1위,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13_008643|장원으로 입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선조(조선)|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소성대비)의 폐출을 논하자 그들과 멀리하였고, 인목왕후가 유폐되자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623년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고, 통덕랑(通德郞:정5품)으로 그해 열린 알성시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23_005309|급제하였다]]. 1624년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사에게 한수(漢水) 이남에서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거두어 공급하였다. 당시 공조참판 [[김경징]]이 군관을 장살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인조는 훈계 선에서 넘어가려 하였으나 사헌부에서는 죄를 청하였다. 당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정엽이었고, 나만갑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이때부터 김류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결국 김경징은 벼슬이 강등되었다.] 1625년 4월 정엽이 사망하였다.[* 사망 3일 전 몸이 좋지 않다고 사직을 청했는데 인조가 반려하고 내의와 약을 보냈다. 사망 다음날 바로 인조의 명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가 아꼈던 것 같다.--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사위에게 힘이 되었을텐데--][[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4011_004|실록 졸기]]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교리(校理)로 승진한다. 5월 이조판서 김류가 남이공을 대사헌에 천거하여 임명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실록은 '이때 남이공이 외람되이 헌장(憲長)을 차지하여 인망(人望)이 부족하였는데 김류가 천거해 임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한마디도 입 밖에 내어 논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아래 링크 함께 참조.] 나만갑이 홍문관 응교 박정(朴炡)[* 인조반정 정사 3등공신이다. 나만갑과 절친한 사이였고, 교류가 아들대로 이어진다. [[박세당]]의 부친이다.], 부응교 유백증(俞伯曾, 1587 ~ 1646)[* 역시 박정과 함께 인조반정 정사 3등공신이다. 훗날 이조참판, 대사헌에 이른다.], 교리 김반(金槃), 부수찬 이소한(李昭漢)[* [[이정구]]의 아들이자 이명한의 동생. 세 부자는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에 비유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이명한의 아들(곧 이소한의 조카)와 나만갑의 딸이 혼인하게 된다.]과 함께 남이공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아 체직을 논하자[* "대사헌 남이공은 약간의 재국(才局)은 있다 하지만 그 행신과 처사에는 본디 칭송할 만한 선한 점이 없고 유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과 심복이 되어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지 오래입니다. 하자를 씻어버리고 하찮은 인재까지도 모두 거두어 쓰는 때를 당하여 재주에 따라 적소에 쓰는 것은 혹 불가할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각에서 활개치며 장관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여론이 비웃어 남을 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이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헤아리게 하더라도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5007_002|링크]]], 김류가 세 사람(나만갑, 박정, 유백증)이 붕당을 이루어 이조를 비방한다고 인조에게 아뢰어 모두 외직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도승지 [[청음 김상헌|김상헌]]이 실드해주었으나 소용 없었다. "박정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은 신들이 즉시 전지(傳旨)를 받들어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박정 등이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차자를 올린 것은 구규(舊規)를 어긴 것이긴 하지만 ‘상의하지 않았다.’고 말씀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이공이 헌장(憲長)에 합당치 않다는 논의도 또한 박정 등이 졸연히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를 ‘헌장을 저격하였으며,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은 편들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한다.’고 하는 것은 또한 실정이 아닙니다. 더구나 박정 등의 상소에 지리하고 외람한 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또한 어찌 감히 공론을 가탁하고 허위를 꾸며 군상을 속일 마음이 있겠습니까. 박정 등은 오래도록 경연에서 상을 모시었으니, 진실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아량은 하늘처럼 넓으시니 필시 재차 생각하실 것이기에 신들은 삼가 붓을 쥐고 기다립니다."][* 김류는 이렇게 아뢴다. "이 논의는 박정에게서 발론되었고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으니, 또한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나만갑(羅萬甲)은 본시 기가 성한 사람이어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니 조정이 장차 안정되지 못할 단서가 있습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5017_002|링크]]][* 2개월 후에도 논의는 지속되고 있다. 이귀가 경연에서 인조에게 아뢰어 나만갑이 정엽의 사위라는 것에서부터 김류의 원한을 샀다고 언급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7012_001|링크]]] 나만갑은 평안도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당시 김상헌이 시를 보내 지조 있는 삶을 칭송했다. 《청음집(淸陰集)》 권9 〈조천록시(朝天錄詩)〉 〈즉석에서 입으로 읊조려서 강동(江東)의 사군(使君) 나몽뢰(羅夢賚)에게 주다(卽席口占贈江東使君羅夢賚)〉에 “마음 기약 천 년인데 만 리나 먼 이별하매 진중하게 세한 맹세 잊지 말라 말해 주네.(千載心期萬里別, 一言珍重歲寒盟)”][* [[장유(조선)|장유]]도 시를 써서 전송해주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A&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33A_0260_010_0600|링크]]] [[이귀]]의 도움으로 복직한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종사관으로 인조를 호종한다. 1628년 환도 후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병조 정랑(正郞),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29년 이조정랑(正郎) 자리를 두고 이조에서 이소한, 조경(趙絅), 나만갑을 의망(擬望)하였는데 좌의정 김류가 나만갑을 부박(浮薄)하다고 반대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오윤겸]]과 우의정 [[이정구(조선)|이정구]][* 이들은 나만갑이 결국 유배되자 '감히 태연하게 행공(行公)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기도 한다.], 병조판서 [[이귀]], 대제학 [[장유(조선)|장유]][*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33A_0200_010_0020|장유의 차자 링크]]나주목사(羅州牧師)로 좌천되었다.][* 장유와 서로 시를 주고 받은 기록이 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A&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33A_0320_010_0590|장유의 화답시]]. 가 실드해주었음에도, 결국 인조는 나만갑을 유배시킨다.[* 인조는 뜬금 없이 가만히 있던 나만갑의 친구 박정도 나만갑의 당이라고 하여 남원부사로 좌천시킨다. 당시 조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는지 기사가 며칠 동안 계속된다.][* 김류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며칠 후 차자를 올려 나만갑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다가 사직하겠다고도 한다. "신은 시의(時議)의 기휘(忌諱)에 거듭 저촉되어 뭇 노여움이 한 몸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송구스러운 마음에 숨을 죽이고 엄한 견책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지까지 보내시어 부드러운 말로 간절하게 유시하시니, 성은이 깊어질수록 신의 죄는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신이 대략 듣건대, 어제 경연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만갑(羅萬甲)이 신 부자(父子)의 집에 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여운 감정을 품은 나머지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했다.’고 하고는 신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악담을 낭자하게 늘어놓았다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놀란 나머지 바로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신은 본래 고립 무원의 처지로서 성명(聖明) 밖에는 믿을 곳이 없는데, 나만갑을 칭찬하는 소리는 날마다 천청(天聽)에 들어가는 반면 소신의 위급하고 절박한 정상은 아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장을 갈라 스스로 해명하고 머리를 베어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원통함을 간직한 채 참으며 아무 말없이 목숨이 끝나는 날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신의 정상이 정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죄를 다스려 인심을 진정시키고 언자(言者)를 통쾌하게 하소서."][* [[최명길(조선)|최명길]][* 장만의 사위이다.]까지 나서며 나만갑의 귀양과 박정, 장유의 좌천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였으나 소용 없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710003_002|링크]]] 전라도 벽성(碧城)[* 현재의 김제], 충청도 아산(牙山)을 거쳐 황해도 해주(海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김상용(金尙容) 역시 화평론(和平論)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연소한 무리들로부터 크게 실망을 받고 있다 합니다. 나만갑(羅萬甲)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銓郞)에 적합하겠습니까. 나만갑을 쓰고 김세렴을 내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불공정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만갑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필시 부박한 무리들이 서로 선동하여 하는 짓일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나만갑이 전판(銓判)을 비방하기 때문에 전판도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나만갑의 사람됨을 보건대, 기(氣)가 지나친 듯하기는 하나 사려가 깊고 식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신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나만갑은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그를 다시 발탁하여 등용하신 뒤로 그의 우기(愚氣)가 더해져 제반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마치 자기 혼자 담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707011_001#footnote_view1|링크]] 1631년 영의정이던 김류가 죄를 지어 파직되었고, 인조가 나만갑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나만갑이 공신(功臣)과 외척(外戚)의 사치가 도에 지나치다고 공격하였으므로 공신과 외척들이 나만갑을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 1632년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으나[* [[당상관]]에 오름.] 모친 봉양을 위해 외직인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간다. 그러나 성혼(成婚)한 자식들을 데리고 부임하였다고 공서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35년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죄인 석방 서류를 바로 결재하지 않은 이유로 좌의정 오윤겸을 비판하였다가 인조가 오만불손하다며 파직시킨다.[* --과거 자신을 실드해준 오윤겸도 비판할 게 있으면 비판하는 남자.-- 우의정 김상용의 실드가 있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파직당해 있던 나만갑은 말 한필을 타고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따라들어가 인조를 호종한다. 과거 종사관 시절의 경험을 살려 공조참의, 병조참지로 관량사 역할을 하며 군량 공급에 공을 세운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인 병자록을 훗날 회고하며 쓰게 된다.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 격렬하였고, 인조가 비축된 군량미를 물은 기록이 있다.[* “원래 수효는 6천여 석인데, 현재는 2천 8백여 석이 남아 있습니다.” 하고, 척화파의 입장에서 청나라 군사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병자호란은 조선의 항복으로 끝났다. 호란 당시 나만갑의 모친이 서산으로 피난 갔다가 1637년 사망하였고, 나만갑은 충청도의 관선(官船) 한 척을 사서 어머니를 운구하여 경기도의 선영에 묻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C&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66A_0100_010_0190|송준길의 위로 서한]] 1640년 사면을 받아 경상도 안동의 [[영주시|영천군]](榮川郡)로 이사를 가 중앙 조정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김상헌이 당시 안동에 있었다. 아들 나성두도 김상헌 문하에 출입하였다.] 유배지에서 얻은 병이 위독해지며 1642년 51세로 사망한다.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나만갑의 죽음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인조는 나만갑에게 관작(官爵)을 되돌려주게 하고 예조에서 부조를 하도록 하였다. 호란 시기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로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대신(大臣)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58년에 건립된 신도비의 비문은 [[김상헌(조선)|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새겼다. [[경기도]] [[구리시]]의 안정나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5986&cid=62132&categoryId=62132|묘비명 링크]][[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7A_0190_010_0080|김수항이 작성한 묘지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