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필순 (문단 편집) == 생애 ==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 1844 ~ ?)[* 자는 성첨(聖瞻), 족보명은 김응기(金應淇).]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의 5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안성은 여사는 아버지 김성섬의 둘째 부인으로서 현재 광산김씨평장대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족보에는 첫째 부인인 [[현풍 곽씨]] 곽이복(郭履福)의 딸만이 등재되어 있다.] 일찍이 [[배재학당]]을 졸업하였고,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가 1900년부터 [[올리버 R. 에이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일하면서 여러 의학 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한편으로 [[연세대학교/학부/의과대학|제중원의학교]]를 다녔다. 재학 중에 [[YMCA|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번갈아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동하였는데, 평소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하여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가입,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08년 [[연세대학교/학부/의과대학|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하고, 제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협의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1911년 다른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청나라]]로 망명하여 [[이동녕]]·[[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 후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을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는 한편,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하고자 하였는데, 일제 특무요원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조수가 준 우유를 마신 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9월 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2018년에 자랑스러운 배재인상을 수상하였다. 2021년에 연세대학교에서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수여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연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1878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독살된 인물]][[분류:광산 김씨]][[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배재고등학교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