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천해 (문단 편집) === 북한에서의 활동 === 북한에 입국한지 얼마 안되어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조국전선을 지도하는 당중앙위원회 사회부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홍기주, 강량욱, 고봉기, 기석복, 김달현, 김두삼, 김승화, 김용진, 김익선, 김창준, 리영, 리효순, 림해 등 33인과 함께 로력훈장을 받았다. 이때 직함이 조국전선 의장으로 불려진 것을 봐서는 그 이전에 이미 조국전선 의장에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민산]]이 사회부장에 임명되면서 물러났다. 1954년 5월, 조국전선이 개편되면서 조국전선 의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12월, 조국전선 2차 대회에서 의장 및 중앙상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5월 1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환갑기념 두번째 로력훈장을 수여받았다. 1959년 5월, 김창준 장의의원,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1년 5월 13일, 조평통 수립 후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오기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1961년 쯤에 이르면 김천해가 자신이 일본에 가지고 있던 기반만 믿고 타성에 빠져서 대일공작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고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5년 3월, [[안재홍]] 장의위원, 1965년 7월, [[정로식]] 장의위원,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정치적 중요성은 떨어졌는지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하였으며 많은 자료들이 뭘 잘못 보고 썼는진 모르겠지만 김천해가 3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고 쓰고 있으나 북한에서 발표한 대의원 명단과 상임위원회 명단 어디에도 김천해의 이름은 없다. 그래도 조국전선 의장 자격으로 공개활동은 계속 이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