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랑 (문단 편집) == 여담 == *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시인이 살았던 영랑생가를 관리하고 있다. * 관동 대지진으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던 김영랑은 1923년 자주 서울과 강진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崔承一)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여동생인 [[최승희]]를 알게 되어 그해 11월경부터 1925년까지 연애를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마침내 혼담까지 오갔다고 하는데, 부친의 반대 등으로 결국 이별하였다. 이때 김영랑은 자살까지 기도할 만큼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https://www.segye.com/newsView/20161118002182|#]] *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으며[* 김영랑은 '배만 곯는 문학 예술따위 하지마라'며 자식들에게 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김영랑의 자식들 대부분은 [[불어불문학]]·[[영어영문학]] 등 [[어문학과]] [[교수]]가 되거나 [[언론인]]이 되었다(...) 2004년 2월 22일 [[https://www.mk.co.kr/news/home/view/2004/02/54236/|별세한]] 김현태 [[단국대학교]] 어문학부 프랑스어전공 교수가 대표적이다.], 대부분 해외로 이민을 갔으나 막내딸인 김애란씨와 손녀인 김혜경씨가 국내에 거주 중이다. 2018년 건국포장 추서 당시 해외에 있는 다른 자제들을 대신해 아버지의 훈장을 수여받았고 건국포장을 부친의 고향인 강진군에 기증했다. * "피아노"로 유명한 시인 전봉건이 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필적 확인 문구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가 바로 김영랑 시인의 시 「바다로 가자」 속 시구의 일부이다. * 2020학년도 [[6월 모의평가]]의 필적 확인 문구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이 「수풀 아래 작은 샘에서」속 시구의 일부이다. * 생전 교우관계가 굉장히 방대했는데 [[3.1 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이 있었지만 [[서정주]]나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친일로 돌아서고도 '생계때문에 돌아설 수도 있다'며 크게 나무라지 않고 친분을 어느정도 유지했고, 결혼식 주례는 [[여운형]]이 서줬을 정도였다. [[정지용]]이나 [[카프]]계열 문인들하고도 교우가 있었고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김광섭]]과도 정말 친해서 김광섭의 도움으로 중앙청까지 들어갔었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 상을 엎을 정도로 크게 싸우고 나서도 친하게 지냈다. 잠시 중앙청이나 대동청년단에 몸담은 경력으로 인해 우익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영랑은 생전 우익으로 간판바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싫어서 출판국장이라는 멀쩡한 직장도 걷어차고 나왔다. 김영랑의 셋째 아들인 김현철씨는 생전 아버지에 대해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한 진보 민족주의자로 평가했다. * 그의 아들 김현철은 한때 [[박정희]] 대통령이 [[김삼화(배우)|김삼화]]라는 배우를 성폭행했다는 [[찌라시]]를 퍼뜨린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걸 [[서울의소리]]가 영상으로 내보내며 알려지게 되었고, 덤으로 고창규와 박정규가 이걸 블로그에 게시했다가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다만 김현철은 미국시민권자인지라 처벌도 받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