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병현(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1924년 6월 1일에 윤영기의 안내로 중국 무순 방면의 고등계 첩자이며 무순조선인회 악질 친일파 정갑주(鄭甲周)와 그 가족을 현장에서 암살하며 사형 선고문을 붙이는 공을 세운다 1924년6월7일 봉천성 보민회 회장 최정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최정규가 숨어 최정규 암살은 실패, 그의 장모 이씨는 현장에서 살해, 처 허균은 총상을 입혔다(처는 총상후 몇 일뒤 사망하였다.) 1924년 6월7일 김광추, 박희광과 함께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다. 저녁 금정관(金正館)에서 군자금을 삼백원을 받아 나오다 중국관헌에게 김병현, 박희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김광추는 달아나 조선인 집에 숨어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몇 일뒤 일본 밀정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총격전 끝에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광추는 총격전을 벌이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병현, 박희광의 체포 현장에서 증거물로 권총 세자루, 실탄 160발, 폭탄 한 개, 사형 선고문 여러장을 압수했으며, 체포된 박희광과 김병현은 중국관헌, 일본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가 관동청지방법원의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의 보호를 위해 비밀을 지켜냈다. 1943년까지 [[뤼순감옥|뤼순형무소]]에서 [[신채호]], [[이회영]], [[우덕순]], [[박희광]] 등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의열단/단원]][[분류:몰년 미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