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시장 (문단 편집) == 역사 == [[일제강점기]] 당시 이 곳은 [[일본인]] 구역이었으며 조선인 구역은 지금의 [[동구(부산)|동구]] 일대였다. 일본인 구역이라서 [[아파르트헤이트|조선인은 출입금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대도시들은 이렇게 주 활동구역이 민족별로 나눠진 경우가 많았다. 가령 서울의 경우 [[중구(서울)|중구]] [[명동]], [[충무로]](혼마찌도오리) 일대가 일본인 구역이었고 [[야인시대]] 등에서 그 분위기가 묘사된다. 그러다가 [[8.15 광복]]과 함께 [[히키아게샤|수만 명의 일본인이 한꺼번에 고국으로 빠져나가면서]] 생겨버린 도시 중심부의 빈 공간에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떼기시장'''이라는 이름이었다.[* 광복직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 상당수가 귀국하는 배에 오르기 전 가방이나 물품등을 한국인들에게 압수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압수된 물건들을 경매로 파는 곳이 당시 도떼기시장 지금의 국제시장이다.(그 밖에 장물이나 밀수품도 많았다) 도떼기 란 말은 일본말 돗따(取った, Totta)에서 나왔는데, 챙겼다, 땄다, 잡았다는 뜻으로 경매시장에서 물건을 낙찰받기 위해 사람들이 '돗따'라고 외치는 데서 유래했다.][* 지금도 부산 방언으로 지나치게 시끄럽거나 어수선한 분위기를 두고 "이 무슨 도떼기시장도 아이고"라는 식으로 나무라듯 말하는 데에 사용빈도가 높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되면서 전쟁에서 안전한 유일한 곳이 되자 전국에서 엄청난 피난민과 [[미군]] 구호물자, [[밀수]]품이 [[부산항]]으로 유입되었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국제시장은 구호품을 빼돌려 팔면서 그야말로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외제품을 주로 취급하던 흔적은 지금도 이웃인 깡통시장 등에 남아있다. * 이런 외제물건 수입하는 점포들은 국제시장 외에도 서울(남대문)[* 전쟁 중에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전체가 숫제 미군PX이던 시절도 있었다.], [[여수시]], [[마산]] 등 미군부대가 주둔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권을 형성했다. 이들 상권들은 미군 원조가 줄어든 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입한 생필품 등도 취급하며 70년대 말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개중 서울 남대문이나 부산 국제시장은 상권이 살아남아 변화한 케이스에 해당. * 이 때 한국전쟁통에 얼마나 해먹었냐면 미군 하역 물자의 '''10% 내외'''가 빼돌려져 망실처리될 정도였다.[* 보통 빼돌려지는 망실률이 1~5% 정도였다는데 최소 그 두 배 이상을 해먹은 셈.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워낙 사람이 많고 못 살았기 때문에 빼돌려지는 것을 알고도 일선 차원에서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는 미군의 물류체계 시스템이 바뀌어버렸는데 그게 바로 CAU, 즉 '''컨테이너 시스템'''이다(...). 원래 2차대전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크레인으로 물자를 일일이 내리던 것을 거대한 철제깡통 상자에 넣고 봉해서 실어버린 것. 현대 해운의 효시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의 CAU화는 세계 여러 항구의 암시장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밀수되는 품목은 아니지만 아직도 미군 [[전투식량]](C-Ration)들이 깡통시장 구역에 공급되어 판매되는 중이다(...). * 전성기 국제시장의 경우 그야말로 '없는게 없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웃의 [[부평깡통시장]]은 그냥 국제시장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해도 될 정도로 붙어있는데다가, 옆동네인 남포동은 '''국내 최대 수산시장'''인 자갈치시장이 자리잡은 '''부산최대번화가'''였고, 여기에 [[보수동 책방골목]]도 길 건너에 인접해있는 정신나간 상권을 자랑했다. 현재는 전성기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죽은 상태지만 어디까지나 '전성기에 비하면'일 뿐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귀국한 [[재일교포]]와 돌아갈 곳 없는 이북 출신 피난민들은 연고가 따로 없어 근처에 정착해 국제시장 상권에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1953년]] [[1월 30일]]에 일어난 [[국제시장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일본 제품이나 한소수교 이후에는 러시아 보드카 등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을 다양하게 취급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부산이 관광지가 되며 조금씩 알려지다가 [[국제시장(영화)|동명의 영화]]가 히트를 친 이래 전국에 알려져 방문객 수가 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