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희(서진) (문단 편집) === 사마월과의 갈등 === 급상의 세력을 멸한 직후, 사마월은 구희를 집에 초대해 자신의 어머니를 뵙게 하고는 그 앞에서 함께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남윤 반도(潘滔)가 사마월에게 건의했다. > 연주는 천하의 요충지로, [[조조|위무제]]가 이 땅을 기반으로 한 황실을 보좌한 바 있습니다. 구희는 큰 뜻을 가지고 있으니 신하로 남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진데, 장기간 그에게 연주를 맡긴다면 걱정거리가 내부에서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구희를 청주로 옮기고, 그 대신 상과 명예로 극진히 대접해 그를 기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전하께서 직접 연주를 손에 넣어 천하의 땅을 통솔해 진 황실을 지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소위,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책을 세우는 것이고 어지럽혀 지기 전에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를 지당하다 여긴 사마월은 동년 12월 27일, 스스로 승상, 영연주목, 도독연예사기유병6주제군사에 오른 후, 구희를 정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시중, 도독청주제군사, 영청주자사로 삼고 동평군공에 봉하였다. 구희는 순순히 청주에 부임했으나 둘 사이는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돈구태수 위식(魏植)이 유민들에게 겁박받아 무리 5 ~ 6만을 이끌고 연주를 노략질했다. 구희는 동생 구순(苟純)에게 청주를 맡기고, 연주 무염(無鹽)에 주둔해 위식을 격파했다. 한편, 구희 대신 청주를 통치하게 된 구순은 [[왕미(전조)|왕미]]의 침략을 막는 공을 세웠지만 형보다 훨씬 엄격한 형벌로 지역을 다스리니, 백성들 사이에선 '소구(小苟)가 대구(大苟)보다 더하다.'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308년 4월, [[전조(오호십육국시대)|한나라]]의 진동대장군 왕미가 일전에 구순에게 패해 흩어졌던 무리들을 규합해 청, 서, 연, 예주를 공격하고, 지나는 군현마다 그 수령을 죽였다. 구희는 왕미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고, 오히려 13일에 왕미에게 허창을 내어주고 만다. 왕미는 19일에 낙양까지 진격했다가 [[장궤]]가 보낸 장수 북궁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310년, 반도와 상서 유망(劉望)이 또 구순을 모함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알고 분노한 구희는 사마월에게 반도 등의 목을 구하고, 종사중랑 유흡(劉洽)에게 군을 맡겨달라 청했으나, 사마월은 전부 불허했다. 답변을 받은 구희는 울부짖으며 사마월과 완전한 결별을 표했다. > 사마원초는 재상이 되어서도 공정하지 못해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이 구도장이 어찌 도(道)를 등진 채 그를 섬길 수 있겠는가! 한신도 [[한고조]]에게 의식(衣食)의 은혜도 갚지 못하고, 누명을 써 [[여태후|여인]]의 손에 죽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 국가의 도적을 주살하고 황실을 받들어, [[제환공]]과 [[진문공]]의 예에 따르겠노라! 이리하여 여러 주에 격문을 보내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고 사마월의 죄상을 늘어놓았다. 당시 [[진회제]] 또한 전권을 쥐고 있던 사마월을 미워해 구희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 짐이 부덕하여 위로는 종묘를 번거롭게할까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곤궁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지금이야말로 지방관들이 나라의 병풍이 되어주어야 한다 생각한다. 공사번, 급상 등을 주살하고, [[유교(삼국지)|유교]]와 여랑을 달아나게 하고, 위식 도당을 주살한 그대의 위덕이 왕성히 빛나니, 어찌 높은 식견과 뛰어난 판단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짐은 그대에게 의지해 성과를 얻으려 한다. 더불어 왕미와 석륵이 사직의 우려가 되고 있으므로, 이 조서를 통해 6개 주의 통치를 그대에게 맡기겠다. 지금 이 조서를 보았다면 그대는 6개 주에 다시 격문을 띄워, 공동으로 거사를 이룩해 국난을 제거하고 짐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 구희는 황망히 조서를 받들고는 휘하의 제장과 주군의 지방관들에게 격문을 다시 돌려 군사를 소집했다. 310년 12월, 왕미는 조억(曹嶷)을 보내 서주 낭야군을 격파하고 북진해 청주 제(齊)군까지 손에 넣으니 군영이 수십 리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막강하였다. 구희는 청주로 돌아와 조억과 여러 번 싸워 격파했다. 그러나 조억의 군사는 무척 많아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311년 1월 14일, 성벽 위에서 적 군영을 바라보던 구희는 이번엔 적들을 확실하게 격파하기 위해 정예병을 골라 성에서 나와 조억과 크게 싸웠다. 이때 돌연 분 강풍으로 인해 흙먼지가 일면서 구희의 군사들이 크게 동요했고, 결국 조억에게 대패해 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하였다. 조억이 추격해 동산(東山)에 이르자 휘하 병력들은 모두 조억에게 항복해버렸다. 구희는 다시 단기로 고평(高平)까지 도망친 뒤, 식량창고를 열어 군사 수천을 모았다. 조억과의 전투에서 패배 이후, 구희는 회제와 서로 밀서를 주고받으며 사마월을 도모하고자 했다. 사마월은 이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성고(成皐)에 기병을 풀어 동향을 감시했는데, 과연 구희의 심부름꾼이 잡혀 밀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예주에 있던 사마월은 그 내용을 보고는 몹시 노여워하며 격문을 띄워 구희의 죄상을 나열했다. 그리고 종사중랑 양모(楊瑁)를 연주자사로 삼아, 서주자사 배순(裴盾)과 함께 구희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구희도 본격적으로 움직여, 먼저 기병을 보내 하남윤 반도와 그 무리들을 사로잡았다. 반도는 밤에 빠져나와 도망쳤으나, 상서 유증(劉曾), 시중 정연(程延) 등은 구희에게 참살당했다. 자신의 측근들이 숙청되자 사마월은 울분을 토하다 이내 311년 3월에 항현(項縣)에서 분사하였고, 배순 등도 왕상(王桑)에게 패배해 죽임을 당했다. 회제는 죽은 사마월을 현왕(縣)으로 격하시킨 뒤, 구희를 대장군, 대도독, 독청서연예형양육주제군사로 삼고, 식읍을 2만 호로 늘린 다음 황금 도끼를 하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