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련 (문단 편집) === 교련교사 === 한 마디로 학교의 [[똥군기]] 반장 -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엄격 진지 근엄|근엄한 표정]]으로 등교시간에 [[위병소|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리. 이 때문에 [[학생주임]] 담당교사와 함께 학교마다 학생들끼리 부르는 [[별명]]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교련교사들은 비 오는 날 실내수업을 진행할 때 자신의 출신부대에 대한 썰을 풀기도 했는데 이 때, 특전사 또는 [[메이커 사단]] 출신임이 드러나게 된 경우 해당 부대와 관련된 별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11공수특전여단|황금박쥐]]와 [[제3보병사단|파란해골]]] [[남고]]의 교련교사들 중에는 [[사범대학]] 출신이 아닌 [[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예비역]] [[장교]] 출신[* 보통 [[대위]] 혹은 [[소령]].][* 일제의 경우, 사범학교에 배속된 교련교사는 대개 '''현역 [[일본 육군]] [[소령|소좌]]'''였다. 예비역도 아니고 현역을 학교에 박아놓은 것이다.]들이 많았다. 정규 대학 졸업장을 가진 ROTC 출신이라든가, 아니면 그 외의 여러 방법으로 정규 대학을 나온 장교로서 교련과 일반 과목을 겸임하던 교련교사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장교들 중에 [[육군3사관학교|3사]] 출신 장교들은 정식 교사 자격증이 있는 대학졸업자가 아니었다. 당시 육군3사관학교는 현재처럼 [[전문학사]] 학위 취득자 및 4년제 대학 2학년 수료자를 편입학시켜 3, 4학년 과정을 교육하는 정식 대학이 아니라, 고졸자를 모집해 1년 6개월 간 훈련시켜 내보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는 전문학사 취득자 및 4년제 2년 수료자를 40주간 훈련시키는 비학위 과정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학제로 바뀐 것은 교련 쇠퇴기이던 1996년이었다. 즉, 3사 출신 장교들은 [[갑종장교]] 등과 같이 최종 학력이 고졸, 나중에 과정이 개편돼서 [[대졸]]이었다. 인터넷 상에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는 글 중에, 개념 교련교사의 글이 간간히 보이긴 한다. 계속 공부를 해서 정식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들을 의리로 보살핀 교련교사가 가뭄에 콩 나듯 있었던 모양.[* 실제로 학생들이 이런 모습으로 기억한 교련교사들은 일명 '''똥군기'''를 부리기보다, 고등학교 졸업 후 길어야 5년 남짓 이내에 입영 대상자인 제자들에게 최대한 군대에 적응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고 사람 좋은 선생이었다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편이다.] [[여고]]와 [[남녀공학]] 여자반을 담당한 교련교사의 경우 거의 100%의 확률로 [[국군간호사관학교]] 출신에 [[교직과정]]을 이수한 경우였으며 보건(당시 명칭은 양호)을 겸임하였다. [[남녀공학]]일 경우[* 당시에는 남녀공학이 국립 [[사대부고]]([[서울사대부고]], [[부산사대부고]] 등등) 외에는 극히 드물었으며 [[남녀합반]]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이었다.]에는 남교사와 여교사를 모두 배치했으며 남교사는 남자 반만, 여교사는 여자 반만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혼성수업[* 남교사 & 여학생, 여교사 & 남학생, 그리고 남학생 부상병 & 여학생 간호병 역할 조합 등]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것은 어찌보면 남녀공학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는데 간호장교 출신의 여교사가 남학생들에게 [[아트로핀]] 투약방법 같은 화생방 대응요령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지도를 하거나 야전장교 출신의 남교사가 여학생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대피요령(엄폐, 은폐, 대피소 내부 환경유지 방법 등)을 가르치는 등 나름 수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예비역 장교이기만 하면 교련을 가르칠 수 있었으므로 교사 TO가 적은 지방 고등학교나 인사권이 재단에 있는 사립학교에서는 일반 교과 교사 중 [[학생군사교육단|ROTC]] 및 [[학사사관]] 경력이 있는 교사에게 교련교사를 겸임하게 하기도 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교련을 겸임하는 그 일반 교과 교사들이란 대부분 체육이었다. 교련교사들이 워낙 억세고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의하는 다른 교사나 학부모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사례들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잘린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타 학교 전근이라는 경징계에 그쳤으므로 이런 면에선 굉장히 꿀보직이었다. 다른 정식 교사들, 심지어 당시 교사들 사이에서도 힘만 세고 무식한 것들이라며 무시당하던 [[체육교사]][* 높으신 분들부터 학생, 일반인들까지 다수의 편견으로 은근히 무시받지만 임용 경쟁률도 높으니 임용까지 된 체육교사를 너무 비하하지는 말자. 정작 진짜로 질 떨어지기로는 [[공업고등학교]] [[전문교과교사]]가 더했다. 학교가 학교다보니.]조차 무자격으로 교단에 서던 교련교사를 무시했다. 교련 과목이 존재하던 시절의 기사만 살펴봐도, 교사체벌로 인해 일으킨 사고사례 중 다른 과목에 비교해서 교련과목 교사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편이다'''. 비하의 의미는 아니나, 진급에서 탈락한 초급장교(잘해야 [[소령]] 전역) 출신이다보니 행실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었기 때문. 실습 시간에는 예비군 전투복을 입었으며 취향(?)에 따라 이론 수업이나 사무실 등에는 일반 정장과 예비군복 차림이 갈렸다. 드물게 [[정복(의복)|정복]]이나 [[근무복]]을 입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교련교사들의 폭력성에, 참다못한 학생 몇 명이 한 밤중에 얼굴 가리고 교련교사 집 앞에 매복하고 있다가, 잠깐 바람쐬러 나온 교련교사를 집단폭행하고 도망친 사례도 종종 있었다. 졸업식날엔 학주 등과 함께 졸업생들의 차량 테러를 걱정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교련교사들도 돈과 권세 있는 집안 자녀는 잘 대해주었다. 이 당시에는 학교예산 부족으로 학교 기자재 상당수를 학부모 후원회의 후원으로 마련했던 경우가 많아 잘못 건들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교련 교사들도 이들한테는 극진대우. 1978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장군의 아들은 박성춘이 있다.[* 이때 교련교사를 맡았던 배우가 [[김병춘]]이며 실제와 비슷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소지품 검사 때 순한 [[양(동물)|양]]처럼 아버님은 잘 계시지 하면서 굽신굽신 거리고 박성춘이 찍새랑 도박해서 돈을 잃었는데 이때도 당연히 박성춘의 편. 간혹 교련교사가 특정인만 티나게 편애하기 부담스러워 하거나, 빽있는 학생이 자기 절친이나 급우, 아예 학년 전체를 커버쳐줘 교련 교사의 폭압질이 전반적으로 완화 혹은 없다시피하게 되어 친구 덕에 교련 편하게 받는 일도 드물게 있었다. 물론 위 서술에서 교련교사가 문제투성이였다고는 하지만, 어떤 부류의 학생들에게는 결정적인 때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바로 육, 해, 공, 간호 등 사관학교의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는 별도의 입학전형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교련교사와의 입시상담이 절대적인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체력검정의 당락 기준과 별도의 본고사에서 신경쓸 과목, 진학 이후의 학교생활과 임관 후 진로 등에서는 3사 출신 교련교사의 그 경험과 짬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간호사관학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한 면이 두드러진게 양호/교련을 겸임하는 여교사의 절대 다수가 간사 출신이고 더욱이 퇴역 후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부임해서 근무하는게 심적 안정성을 주는 상황에서 간사 입시를 준비하는 후배학생들이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가는게 현실이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