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종(송) (문단 편집) === 강제 퇴위와 죽음 === 이런 와중에 [[효종(송)|효종]]과 광종의 갈등은 태자 책봉 문제를 계기로 폭발하고 만다. 광종은 아버지가 자신과 이봉랑의 아들 [[영종(송, 13대)|조확]]이 아닌 조카 가국공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한다고 의심하며 효종과 이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광종이 효종의 생일에도 아버지의 처소를 찾지 않기에 이르며, 심지어 아버지가 아들과 화해하려고 술과 잔을 보내왔지만 광종은 오히려 화를 내고 아버지가 보낸 술잔을 부숴버렸다. 이봉랑의 이간질과 광종의 의심이 결합되어 부자 사이는 벌어졌고, 결국 아들을 그리워하던[* 왜냐면 효종은 자식들이 광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한터라 남은 자식이 광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이 일로 병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광종은 오히려 “짐이 심질(心疾: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라며 변명만 하고 효종의 거처인 중화궁에 문안을 가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아버지가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한다는 의심까지 하며 아버지를 찾아가고 잘 지내보라는 황실과 신하들의 권유조차 거절했다.[* 일례로 신하들과 같이 꽃놀이를 하며 술을 마시며 놀던 도중에 신하들이 아버지를 초청해서 같이 즐기자는 상주문을 주었는데 효종은 오히려 크게 화를 냈다.] 이로 인해 조정 안팎에서는 광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광종이 “[[효종(송)|태상황]]의 병문안을 가겠다”고 발표하며 마무리되나 싶었던 상황에서 본인이 이 발언을 취소했고, 이후 다시 한다고 했다가 이를 뒤엎는 등 오락가락한 행동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런 광종의 모습에 민심은 이반하고 황제에 대한 신하들의 신망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종 순간에도 아들을 그리워하던 효종이 결국 사망했다. 하지만 이때도 제정신이 아닌 광종은 효종의 죽음을 믿지 않아 상을 치르려 하지 않았다. 더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평소처럼 후궁으로 향했다. 이런 광종의 행동에 아들인 황태자 조확이 보다못해 찾아와 울면서 할아버지의 상을 치루자고 했지만 광종은 이마저도 믿지 않고 의견도 듣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에 재상 [[조여우]][* 송 태종의 후손으로 황실 종친이다.], [[한탁주]][* 인종, 영종 대의 명신 한기의 증손자이자 [[헌성자열황후 오씨]]의 외조카로 송황실의 외척이다.] 등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태황태후인 [[헌성자열황후 오씨]]와 의논하여 민심과 조정의 신망을 잃고 광기로 인해 정상적인 황제 업무가 불가능해진 광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차남인[* 형인 장남 조정은 요절했다. 사실 광종도 아버지 효종처럼 자식들이 차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황태자 조확을 즉위시켰다.[* 광종의 장남 조정은 요절했고 조카인 조병은 태황태후가 차기황제가 되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따라서 조확이 뒤를 이었다.] 이후 광종은 명목상 상황이 되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발작 증세 등을 보이다가 경원 6년이던 1200년 9월 17일 고독 속에서 향년 54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영숭릉에 안장되었다. 한편 자의황후 이봉랑 역시 남편이 강제퇴위 당한 이후 1200년 7월 56세의 나이에 남편처럼 고독 속에 사망했는데, 얼마나 밉보였으면 누구 하나 시신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궁녀 중엔 시신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엔 한 환관이 시신을 거두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