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이오 (문단 편집) == 평가 == 2,000년도 더 지난 옛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을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다.[* 이외에 빠지지 않고 꼽히는 후보로는 [[초한전쟁]]에서 [[항우]]에게 번번히 밀리던 [[고제(전한)|유방]]을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보좌해 끝내 [[전한]] 건국을 달성해 내고, 이후 [[상국]]의 자리에 오른 명재상 [[소하]], [[부견]]을 도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식시킬뻔 한 [[전진]]의 명재상 [[왕맹]], [[당나라]] [[태종]]을 보좌하며 [[정관지치]]를 일궈낸 명재상 [[위징]],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의 개국을 이끌어낸 개국 공신이자 [[청백리]]였던 명재상 [[이선장]], [[명나라]]의 뛰어난 교육자이자 [[만력중흥]]을 이끌었던 재상 [[장거정]] 정도.] 부국강병을 통해 제나라를 일약 중원의 패권국으로 길러냈고, 존왕양이로 요약되는 외교정책을 펼쳐 춘추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설계했다. 자신의 나라를 당대 초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업적 뿐 아니라 법가 정치철학의 토대를 다져 사후에도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남겼다는 점, 그리고 제환공과 아름답기까지 한 완벽한 군신 간 팀워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비록 그가 일군 제나라는 그와 [[제환공]]의 죽음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막장화 되면서 패권을 놓치고 말지만 [[진문공]]이 패권을 잡으며 강대해진 진나라 역시 관중이 설계한 질서를 그대로 따라갔다. 또한 제나라 역시 워낙 관중이 다져놓은 유산이 탄탄했던 탓에 패권을 놓쳤을 뿐 진시황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3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번도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국력의 변화는 있어오긴 했지만 영성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강해진 시점에서도 일단 제나라는 진나라에 맞먹는 강대국이라서 한때는 진나라가 흔해터진 왕 말고 서제, 동제 만들어서 나눠가지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얼마 못가 5국연합군에게 털리지만.] 그가 제시한 정치철학과 부국강병책은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 많은 국가들에게 국가경영의 기본 철학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존왕양이 역시 역사적 격변기에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론으로 자리잡았으니 그가 중국의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를 단순한 정치가가 아닌 성현의 반열에 올려 관자(管子)라고도 불렀을 정도. 다만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공자가 이 사람을 안좋게 여겼다고 했다고 썼다. 이유는 '''군주를 [[왕도|덕]]이 아닌 [[패도|힘으로만 천하를 다스리게 해서]]'''. 사실 관중의 언행은 유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편할 부분이 많다. 검약을 중시하는 유교의 입장에서 관중이 군주의 개인적 사치는 그냥 넘어가며 대놓고 부를 우선시하는 언급, 또한 개인도 사치했으며 포숙에 대한 평가를 통해 국정운영에서 곧은 선비로서의 도 외에도 정략의 필요성을 대놓고 긍정해버리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랑캐에게 망해서 없어졌을 거다."라며 그의 능력과 영향력은 인정했다. >([[자공]]이 "관이오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는 인물이다. 그는 백씨에게서 병읍 삼백을 빼앗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직접 설명을 듣고 이해했기에)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평생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 >([[자공]]이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은 주군을 따라 죽었으나 관중은 따라죽지 않았으니 인(仁)하지 못한 사람아닙니까?"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제환공은 제후들을 아홉번이나 자기 아래에 뭉치게 할때도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관이오]]의 노력이 컸다.''' 그 정도면 어진 사람(仁)이다." > >([[자공]]이 "관이오는 자기 주군을 버리지 않고 죽은 소홀과 달리 자기 주군을 배신하고 그를 죽인 [[제환공]]을 도와 재상이 되었으니 어질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관중은 제환공의 재상으로써 그를 도와 제후들의 패자로 만들었고 천하를 바로 세웠다. 그래서 백성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이오|그]]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랑캐의 풍습[* 원문에는 左衽으로 완쪽으로(左) 옷깃을 여민다(衽)라는 뜻이다. [[한족]]은 오른쪽으로 옷깃을 여몄기 때문에 나온 말로 여진족의 야만스런 풍습을 일컬어 좌임이라 부른다. 먼 훗날 [[고려 현종]]이 [[강감찬]]을 평가하며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좌임을 했을 것이요."라며 이때의 고사를 언급한다.]을 따랐을 것이다.''' 그것을 [[필부필부]]가 별것도 아닌 신의를 지키기 위해 [[개죽음|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죽음을 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냐.]]" >---- >'''《[[논어]]》 제14편 헌문(憲問) 中''' 이후에도 뛰어난 명재상을 비교할 때 관이오가 항상 비교되었는데 [[제갈량]]은 [[백수|융중의 초야에 있던 시절]] 자신의 재능이 관중과 [[악의(전국시대)|악의]]에 비할 만한 재능이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