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 (문단 편집) == 멸망 이후의 고구려인들 == [[수나라|중원]] [[당나라|왕조들]]과의 [[고수전쟁|피비린내 나는]] [[고당전쟁|국가간 총력전]]부터 시작해서 이남의 [[신라]]와 전선을 수십년간 맞대었던 고구려는 멸망 시점인 668년에 인구가 69만 7천여 호(戶)로 급감하게 된다.[* 호당 구성원의 수를 5명으로 잡으면 약 350만의 인구가 집계된다.] 그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주로 [[신라]], [[발해]], [[당]] 등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고토에 잔류하거나 [[당나라|당]]을 탈출해 [[발해]]에 합류한 유민들은 훗날 [[발해유민|발해 유민]]의 형태로 [[고려]], [[요나라]], [[금나라]] 등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더러는 [[말갈]], [[돌궐]], [[왜국]] 등으로 도피하였지만 수는 위의 세 부류[* [[신라]], [[발해]], [[당나라|당]].]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았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들의 거취는 대규모 망명, 강제 이주, [[고구려부흥운동|부흥운동]]의 여파로 여러 국가에 걸쳐져 있었다.'''[*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부흥군 수뇌부 일부와 당나라로 끌려간 12,807명을 제외한 인구의 절대 다수가 신라에 편입된 [[백제|백제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백제인들처럼 고구려인들도 오늘날 [[한국인|현대 한국인]], 나아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는 맞더라도 백제인들처럼 '절대 다수'가 [[한민족]]의 역사권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타향으로 끌려가거나 객지에 머물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비(당나라)|고구려인으로서의 의식이 희석돼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을 잇게된 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보존해 종국에는 [[고려]]를 건국한 신라 내의 일파들이다.[* 정확히는 [[패서]] 호족과 주민. '''[[검모잠]] 등이 주도한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의 실질적인 후계 집단'''이다. 전라북도 일대로 남하한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은 현지에 동화되었고 영동의 고구려인들은 패서의 고구려인들만큼 유의미한 세력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대개는 [[고려]]의 건국 이후 합류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동족인 발해인들의 합류에 힘입어 백제인, 신라인과 더불어 [[한민족|한민족(韓民族)]]의 원류(原類)를 구성하는 세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나아가 [[통일신라]]가 실패했던 [[단일민족|세분화된 종족 정체성의 통합]]을 이루어내게 된다.[* 고구려인들이 [[삼한일통]]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3 {{{#89236A 신라}}} ➪}}} {{{+5 {{{#F8E77F 고려}}}}}}''' 첫째로는 신라에 흡수된 일파이다. 신라가 영역화해서 그대로 편입된 인구[* 호로하(瓠盧河), 즉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인 [[개성시|송악]], [[장단군|정주]], [[파주시|파해평사현]] 등을 비롯한 [[경기도|경기 북부]], 고구려 삼경(三京) 중 하나인 '''[[한성#s-1.2|한성(漢城)]]'''과 고구려의 수도권인 [[패서]] 지역에 해당되는 [[황해도]] 전체와 [[평안남도]]의 일부, 그리고 [[강원도|영동]] 일대 등이 있다. [[진흥왕]] 대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신라에 귀속된 국원성(國原聖)이나 남평양(南平壤) 등 한강 이남의 고구려인들은 논외로 한다.], 멸망 직전 [[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 [[삼국사기]] 기준으로 [[연정토]]의 망명 당시 따라나선 귀신(貴臣), 즉 고위 관료들은 집과 땅을 하사받고서 [[서라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안승]]을 따라 신라로 남하해 귀부한 4천여 호[* 670년대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고구려부흥운동]]을 후원하던 신라에 귀부한 집단과는 별개의 무리로, 이들은 [[보덕국]]을 따로 세워 대당 항쟁을 남쪽 지역인 [[백제]] 영토에서 이어나갔다.], [[고구려부흥운동]] 세력[* [[검모잠]]의 무리들로 일컬어지는 [[패서]]와 [[요동]]의 고구려 부흥군. 당시 고구려부흥운동은 [[안시성]]부터 오늘날 [[파주시|파주]]까지 고구려 전역(全域)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만주]] 북부에 위치한 [[부여성]](扶餘城)의 대수령(大守令)이었던 고정문(高定問)은 당나라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구려 백성 69만 8천여 호(戶)를 쉽사리 통제하지 못하면서 [[당나라|당]]은 계속 애만 먹다가 [[발해]] 건국을 시점으로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만다.]의 대다수와 이들하고 연계한 고구려의 반당(反唐) 백성들, 그리고 당나라 영주에서 탈주한 고구려 유민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고 [[패서]]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신형식 교수의 『통일신라사』 및 각종 논문 근거 등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백산말갈]] 출신으로 비정된다. 신라에 합류해 구서당 중 흑금서당을 구성한 말갈족들도 있었으나, 이들이 예맥계 비중이 속말말갈보다도 대단히 높았고 아예 인구로 유입된 다른 말갈 계열까지 예맥화시켜버릴 정도로 토착 문화 발전도가 높은 백산말갈과 동일시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학설들은 고고학적 뒷받침이 되어 있는 설들이며, 누군가가 처음 들어본다고 소수 학설 운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듯 [[진흥왕]] 대부터 고구려 멸망 직후인 [[검모잠]]과 [[안승]]의 [[고구려부흥운동]] 시기까지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인들의 규모는 무시못할 정도로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왕 대에 완성된 중앙군 체제인 9서당 가운데 [[말갈족]]의 흑금서당까지 합하면 총 네 서당이 고구려계들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셋은 신라인, 둘은 백제인으로 구성되었다.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는 황금서당, 벽금서당, 그리고 적금서당이 있으며 고구려인들과 함께 신라에 망명한 말갈인들로 구성된 흑금서당도 있었다. 넓은 의미의 고구려계를 여러 분류로 구분했는데 신라에 언제 어떻게 유입됐는지에 따라 집단이 구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분할통치]](디바이드 앤 룰, 소위 [[갈라치기]])의 의도도 배제하기는 힘들다.][*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내몰려 사상당한 것을 감안하면 [[신라]]로서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삼국을 통일할 실리적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인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개입 이전까지 양면전쟁을 치룰 수 있었던 데에는 유능한 [[명군]]들과 뛰어난 [[명장]]들의 활약, 그리고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하고 강력한 방어망으로 둘러싸인 덕택이 컸다. 하지만 [[김유신]]이 사망하고 그와 함께했던 신라의 황금세대도 늙어가자 나당 전쟁을 기점으로 그 단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신라 본토 바깥의 전쟁에서는 소맥산맥의 도움은커녕 오히려 동고서저라는 한반도의 지형 특성상 지리적 방어막 역할을 제한적으로밖엔 못 해주는 구릉지나 평야에 최대한 인구를 때려박으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당전쟁]] 초창기 부족한 인구를 메우기 위해서 신라가 당장 조치한 일로는 투항한 [[고구려]]와 [[백제]] 귀족에 대한 관등 및 관직 하사 외에도 [[김품일]], [[김문영]], [[김천존]], [[죽지]] 등을 위시로 한 [[웅진도독부]] 정벌이 있었다. 이들 넷이서 옛 [[백제]]의 심장부이자 수도권이었던 웅진도독부의 82성(城)을 취한 뒤 해당 성읍들의 지배층과 백성들을 모조리 신라 내지로 이주시켰을 정도로 신라는 나름 절박했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신라가 무탈하게 차지해서 편입시킨 한성(漢城) 일대[* [[황해남도]] [[재령군]]으로 비정. 고구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로서 [[평양성]], [[국내성]]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대성(大城)이였기 때문에 다수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대한민국|현대 한국]]과 비교하자면 [[경인(지역)|경인 지역]]의 일부로 취급되는 [[인천광역시]] 같은 위상이라고 보면 쉽다.]와 패서(浿西) 지역[* [[서울특별시]]하고 [[인천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 수도권 지역인 [[경기도]] 같은 위상이다. 본래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영역이었지만 [[미천왕]] 대에 고구려가 정복하면서 성장한 배후지다.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됨에 따라 요동, 국내성 일대와 더불어 고구려의 핵심 영토이자 실질적인 수도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은 고구려의 심장부이자 내지(內地)로 일컬어지는 인구 밀집지였다. 이러한 이상적인 조건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부의 부흥운동 세력[* 북부에서는 부여성(扶餘城)의 고정문(高定問)이나 오골성(烏骨城)의 [[고연무|고연무(高延武)]]와 같이 책성 • 안시성 • 요동성 • 신성 등 일대의 대성(大城)과 성읍들이 고구려 부흥세력으로서 대당 항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이 한성과 패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고, 먼 훗날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패서 호족들이 태동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직접 통치를 피해 달아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 주로 [[요동|요동(遼東)]]과 [[압록강]] 일대, 그리고 책성(柵城) 등 동만주(東滿州)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로, [[고구려부흥운동]]과 [[나당전쟁]]을 촉발시킨 신라군의 요동 공격 및 일시적 점유 과정에서 고연무(高延武)가 이끌던 오골성(烏骨城) 주민들처럼 신라로 남하한 이들이다. 이들은 나당전쟁 기간에 걸쳐 꾸준히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br]"이때 [[백제|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야마토|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고구려|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신라|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br] ㅡ [[예군]] 묘지명 中], 고구려 부흥운동의 잔당 세력[*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이후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부흥군 세력 등.], 당나라에서 이탈해 신라로 탈출한 무리들[*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한 무리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무리와 더불어 [[안동도호부]]에 잔류하던 [[요동]]의 고구려인들.]까지 합세하면서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은 사실상 고구려 유민들을 주류로 하는 반자치적인 보금자리 혹은 [[엔클레이브]]로 남게된다.[* 역설적이게도 나말여초에 이르러 신라가 잦은 민란, 천재지변(가뭄, 홍수, 지진 등), 삼림파괴, 그리고 혼란한 정치 상황으로 쇠락하고 인구가 급감할 때, 패서 일대는 비교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윤순옥, 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 [[선덕왕]] 시절에 신라인들을 일부 [[패서]]로 사민시킨 바 있지만 원(原)신라 지역이 쇠락하면서 찰산후 박직윤(朴直胤)처럼 패서(浿西)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왕경인(王京人)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경우 현지의 고구려계 주민 사회에 동화되면서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大謨達)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고구려 유민 사회에서도 신라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면서 후에는 [[김치양|김(金)]], [[해주 정씨|정(鄭)]] 등의 신라식 성씨들을 차용하는가 하면, 신라식 관등 체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였던 [[패서]]의 고구려 유민인 [[왕륭]]은 [[사찬#s-3|사찬]]을 지냈다. 마찬가지로 [[왕건]]의 조상이면서 고구려 유민이었던 자 가운데 스스로 [[골품제]]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각간|각간(角干)]]을 자처한 [[두은점]] 등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를 무려 '''[[호경(신라)|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안승]]과 [[고연무]]를 위시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한 일파는 구 백제의 수도권 지역인 [[익산시|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우면서 존속하다가 [[신문왕]]에 의해 [[서라벌]]과 남쪽 변방[* 예를 들어 신라의 오소경(五小京) 가운데 하나인 남원경(南源京).] 등으로 철저하게 사민당한 탓에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물론 일부는 [[전주 최씨]]나 일부 성씨들처럼 뿌리가 '''[[고구려|북방]]'''에 기인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듯 하다.] 상술한 두 부류의 고구려 유민들에 비하면 존재감은 낮지만 영동의 고구려계 유민들도 신라에 편입되면서 존속하다가 훗날 고구려계 호족들이 세운 [[고려]]에 합류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영동 지방은 원(原)신라 지역이 아닌 '''[[예맥]]의 땅 혹은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사실 이쪽 지역은 [[실직국]]이라는 독자적인 나라가 있기도 했고 영서 지방의 [[맥국]]을 비롯해 기원을 따지면 [[동예]]의 후예로 엄연히 고구려의 가까운 친척이긴 해도 약간 다른 정체성 또한 있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에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을 주장한 패서호족과는 별개로 [[태봉]]이라는 약간 다른 정체성을 주장한 [[궁예]]의 홈그라운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신라 정부에서는 상기했다시피 그냥 예맥인들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옛 영역으로 봤고 궁예가 몰락한 뒤에는 좀 남쪽에 있던 [[왕순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흡수되었다.] 종합해보면,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 중 [[보덕국]]을 구성했던 이들과 전쟁 포로로서 서라벌로 사민된 이들[* [[사천 전투]]와 [[평양성 전투]] 당시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등.] 외의 대다수는 현재의 [[임진강]]과 그 이북인 [[패서]] 지역에서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다가 몇백년 뒤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를 세웠다. 그리고 이는 최종적으로 [[태조(고려)|왕건]][* 송악 출신의 고구려계 해상 호족인 [[왕륭]]의 아들로, [[고려도경]] 등에 따르면 고구려 귀족의 후예다.]이 세운 '''[[고려]]'''로 이어지게 된다. 발해가 멸망한 뒤로 '''고구려의 적통은 사실상 신라에 편입되어 훗날 {{{#F8E77F 고려}}}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계승된다'''.[*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세워진 고려는 [[삼국통일|고구려가 이전에 달성하지 못했던 신라와 백제의 병합]]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발해 유민들을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이백여년에 걸쳐 대거 수용하면서 삼한 내의 개별적인 종족 정체성을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후기로 가서는 삼국을 모두 일정하게 계승했다는 의식이 강해지면서 고구려에 편중된 계승 의식은 희석되고 특히 고조선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고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기에 [[몽골 제국]]의 침탈로 인한 우울하고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유구하다는 자존심을 위해 더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조선 또한 역시 평양을 기반으로 했던 왕조였기에 후대에도 삼국 중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가장 강조되었고 그래서 해모수는 아예 시조 단군과 동일한 신격으로서 합쳐지게 된다. 이런 인식에 힘입어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서 같은 사당에 합사되었다. 또한 고구려 당대에도 이미 단군에게 고조선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이 있던 [[기자(상)|기자]]를 신으로서 섬기기도 했다.][* 고구려를 정신적으로나 영토적으로나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된 [[북진 정책]], [[서경(고려)|서경]] 중시, [[강동6주]] 획득,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 정벌]], [[제1차 요동 정벌|요동 정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자처하고 멸망 이후에도 이백여년 동안 [[발해부흥운동|부흥 운동]]을 전개한 발해 만큼이나 고려도 끈질기도록 [[고구려|선조들]]의 유산을 되찾고자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해 주변국들을 복속했듯이, [[고려]]도 이를 그대로 답습해 전성기 시절 [[요나라]]와 [[북송]]을 상대로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외교 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탐라국]], [[여진족]]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등을 밑으로 두어 조공을 받는 '''[[문종(고려)|해동천하]]'''를 일구었다. 고려의 사신들이 북송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궐에서 요나라 사신을 모욕해도 두 강대국들이 고려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북송의 유명한 시인 [[소식(시인)|소식]]은 아예 고려인들을 '고구려인 도적'이라는 뜻의 '''맥적'''이라 깐 적이 있다.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일대를 호령하던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으며 고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와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하였을 정도로 고려를 경계하였다.][* [[발해유민|발해 유민]]들이 고려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았음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주체인 [[고려]]의 건국 세력, 즉 신라 출신의 고구려인들에게 합류하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계승 의식은 훗날 직계 후손인 '''[[한민족]]에게로 이어져 고구려가 국내외에서 온전히 [[한국사]]로 인정받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혈연 및 정신적인 계승의식은 차치하고서 논하자면, 오늘날 [[한민족]]의 전통문화 가운데 전해지는 것들로 상당수는 [[고구려]]에서 유래하였다. [[김치]], [[불고기]], [[젓갈]], [[된장]] 등의 식문화가, [[온돌]], [[치(건축)|치성]] 등의 건축 문화가, [[한복]] 등의 의복 문화가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 악기로는 대표적으로 [[대가야]]의 [[가야금]]과 함께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거문고]]가 있으며, 무형(無形) 문화로는 한때 [[고려시대]] 때 무신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수박]]의 후신으로 [[씨름]] 등이 전해진다. 언어의 경우 [[이병도]]와 이기문의 학설을 주류로 취급하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현대 한국어]]가 [[신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강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이나 제임스 웅거 같은 해외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논증한 바로 [[신라어]]가 아닌 [[고구려어]]가 한국어의 뿌리라는 주장이 2013년부터 유력시된다.][*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여전히 [[반도 일본어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잖은 상황이기도 하다. [[반도 일본어설]]은 한반도를 원향(原鄕)으로 삼던 고대의 [[일본어족]]이 [[고조선]]과 [[부여]]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족]]에 의해서 일본 열도로 밀려난 것을 골자로 한다.][* 여담으로 알다시피 국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三韓)을 모두 이었다고 해서 정한 [[대한|대한(大韓)]]이라는 명칭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리킬 때 [[한국인|한국인(韓國人)]]이라고 부르지만, 애초 해외에서의 [[한민족]]의 명칭은 신라인(Sillan)도, 백제인(Baekjean)도 아닌 '''고려인(Korean), 즉 고구려인(高句麗人/高麗人)'''이다.] * '''{{{+3 {{{#959EA2 발해}}}}}}''' '''{{{+1 ➪}}} {{{+2 {{{#8E6F80 거란}}}}}} ◦ {{{+2 {{{#F8E77F 고려}}}}}}''' '''◦ {{{+1 {{{#b82647 금나라}}}}}}''' 둘째로는 발해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다만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 뒤에 건국되었고, 발해 건국의 주체들은 한때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음에도 결과적으로 당은 서쪽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영주에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 주로 [[속말말갈]], [[백산말갈]] 출신 등. 이들은 '퉁구스계'가 아니라 소위 '예맥계 말갈'이다.]과 함께 탈출, 동쪽으로 이동해 동만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한다. 이후 발해가 초기 영역을 중심으로 확장하면서 요동과 동만주 일대에 머물러 있던 옛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고 주변 말갈족들을 복속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발해인들은 보통 세 갈래로 또다시 갈라져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자신들을 정복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속된 부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남방의 또다른 고구려계 왕조인 [[고려]]에 대규모로 이주한 부류, 발해 고토에 잔류해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금나라]] 건국 이후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된 부류가 그것이다.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 유민들은 성향에 따라서 정체성을 유지한 쪽[* [[대연림]]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한 유민들.]과 [[거란족]] 혹은 [[여진족]]에 협조하면서 동화된 쪽[* [[고모한]], [[고청명]], [[곽약사]]처럼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자리잡은 유민들.][* 금나라에 합류한 발해인들의 경우, 금나라 황제에게 시집가 황실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금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해릉양왕]]의 어머니는 발해 왕족인 대씨(大氏)였으며, 또한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세종(금)|금나라 세종]]도 어머니가 발해인 추와지(雛訛只)의 딸로 발해계 혈통이었다.]으로 또 나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해부흥운동|발해인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꾸준히 일어나 내부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다만 발해인들이 해당 나라 내에서 전체 인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한인(漢人)들과 더불어 선진 문물의 전수를 통해 요나라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주도한 점은 특기할만 한 점이다. 이들의 대다수는 최종적으로 여진족이나 거란족, 그리고 [[중국인|한족 집단]]으로의 동화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융화된다. 한편, 고려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인들과는 달리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질감과 [[고려 태조]] 대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된 포용 정책 덕분에 쉽고 빠르게 고려 사회에 적응하였다.[* 당시 고려는 발해인들의 인심을 얻고 반(反)거란 의식을 고취시기 위해서 거란의 사신들을 유배보내고 만부교에서 낙타들을 굶겨죽인 적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 문서로.][* 상술했다시피 고구려계라는 의식이 강했던 초기 고려인들은 발해인들을 동족으로 여겼던만큼 [[정안국|출]][[요나라|신]][[여진|지]]가 고려인 이상 따로 발해 출신으로 적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예시가 유충정(劉忠正)이다. 발해 유민으로서 국내(고려)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고영기(高英起), 고적여(高積餘), [[양규|양규(楊奎)]], [[지채문|지채문(智蔡文)]] 등과 달리, 유충정은 사료에서 발해 출신이라고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상 유충정 혹은 그의 선대가 당시 발해로 여겨지던 [[정안국]]에서 979년 고려로 망명한 수만명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이름을 전한 발해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면서 고위 관직을 신라계 • 백제계와 대등한 조건으로 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우와 조치들은 고려인들이 [[한국어족]] 계열의 [[탐라|탐라인]]을 여겼던 방식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것들이다. 1105년 [[숙종(고려)|숙종]] 시기, 탐라군(耽羅郡)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탐라인들은 발해인과는 달리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 '''외국인들만이 응시하는 빈공과'''를 거쳐야 했다. 설령 빈공과를 통과해 중용되었어도 태자 [[고말로]]의 아들로 전해지는 [[고유(고려)|고유]]의 사례처럼 탐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관직을 겸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고유는 심지어 한낱 속국에 불과할지라도 엄연히 [[자견왕]]의 혈통을 잇는 왕족 지위에 탐라인 최초로 관직을 얻은 인재였음에도 말이다. 고유가 탐라인 최초로 임용된 1057년 이전에 등장하는 고씨들은 사실상 고구려계 • 발해계로 보아도 무방하다.]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발해유민|발해 유민들]]의 수[* 934년 한해에 귀부한 세자 [[대광현]]의 무리만 해도 그 규모가 수만이 아니라 '''수만 호(戶)'''였다.][* [[정몽주]]의 시(詩)인 발해고성(渤海古城)에서도 발해 유민들의 귀부를 언급하고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br] '渤海昔爲國, 於焉遺址存, 唐家許相襲, 遼氏肆幷呑, 附我全臣庶, 于今有子孫, 遺民那解此, 嘆息住歸軒.'[br] '먼 옛날 발해가 세워졌던 곳. 아직도 그 자취가 남아있구나. [[당나라|당]]에선 왕위 계승 허용했는데, [[요나라|요것들]]이 함부로 병탄하였네. [[고려|우리]]의 신하와 백성이 되어, 여지껏 그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거늘. (옛 발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어찌 알리오? 탄식하며 수레를 멈춰보노라.'][* [[고려]]에 귀부했다가 죄를 지어 다시 [[거란]]으로 도망친 [[고모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모한의 출신지인 [[요동성]]부터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홀한성(忽汗城)]]에 이르기까지 발해 유민들의 귀부는 소수의 거란군이 점유한 일부 지역까지 모두 포함해 일어나고 있었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에도 불구하고 신라계나 백제계처럼 [[신라부흥운동|부흥을 명분으로 한]] [[이연년 형제의 난|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고려 내의 발해인들이 일찍이 주류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목종(고려)|고려 목종]] 대의 신료였던 유충정(劉忠正), [[여요전쟁]] 당시 맹활약한 [[대도수|대도수(大道秀)]], 대회덕(大懷德), 고적여(高積餘) 등이 있었다. [[무신정권]] 때는 권력자이자 간신배로 이름을 남긴 [[대집성]]이, [[여몽전쟁]] 때는 고려군의 군관으로 활약한 대금취(大金就)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툭하면 현지의 [[거란족]]이나 [[여진족]]과 갈등을 빚었던 [[요나라]], [[금나라]]의 발해인들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일각에서는 고려의 [[후삼국시대|후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발해 유민들을 꼽기도 하는데, 수뇌부의 다수가 전사하고 [[왕건]] 본인이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온 [[공산 전투]]의 궤멸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태세를 정비할 수 있었음에는 고려에 유입된 압도적인 수의 발해 유민이라는 인적 자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각자 [[사병]]들을 거느리던 [[호족]]들이 난립하던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로지 왕건 본인에게만, 즉 고려 왕실에게만 직속으로 신속된 발해 유민들이라는 기반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고려에 정착한 발해인들은 주로 [[북진 정책#s-2.6|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금 개척된 북방 지역[* [[서경(고려)|서경]] 일대와 그 이북인 강동 6주 등.]과 패서 지역[*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북인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일대.]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남쪽 영토[* 특히 구 [[후백제]] 영토.]에도 대거 자리잡아 훗날 [[한민족]]의 원류에 흡수,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이 된다.[* 그러나 건국 주체([[예맥|고구려인]])와 이념([[고려/평가#4|고구려 계승]]), 그리고 역사적 연고권([[패서]]와 [[평양성]])이 분명했던 [[고려]]의 정통성과 연속성 덕분에 온전히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받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건국 주체부터 [[속말말갈]]인지 [[예맥|고구려인]]인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부터 시작해서 예맥계인 고구려인과 숙신계인 말갈족의 인구 구성에 대한 토론이 결론나지 않아 국내외에서 순전히 [[한국사]]로서만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중국인들의 넷상에서의 역사왜곡이 가장 빈번하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발해는 고구려계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주도권을 쥔 지배계층으로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끌어간 나라였다. [[속일본기]]의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발해에서 발해인([[예맥|예맥계]])과 말갈인([[숙신|숙신계]])이 '''따로 구분'''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인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들이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역관들이었음을 보면, 적어도 말갈인이 아닌 '''발해인들은 신라인들과 말이 통하는 [[한국어족]] 집단'''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곧바로 지배층의 다수를 포함한 인구의 상당수가 고구려계 국가인 고려에 귀부한 점, [[고려]]의 [[태조(고려)|왕건]]이 이들을 친척의 나라 혹은 혼인한 나라로 여겼다는 점, 고려가 [[요나라|거란]]으로부터 발해의 말왕(末王)이었던 [[대인선]]을 구출하기 위해 [[후당]]측에 협공을 제의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인과 발해인은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류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계만의 영향력을 앞세울 수도 없는 것이, 발해에서는 인구의 상당을 [[말갈족]]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고려악(高麗樂)에 포함된 발해 음악의 제목도 다름아닌 '''신마카(新靺鞨)'''다. 이는 발해의 건국세력이 비단 고구려계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향유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도 포함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나말여초 대의 성씨들만 보아도 대씨(大氏) 외에도 사료상 신라에는 없었고 발해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지채문|지씨(智氏)]], [[곽원#s-2|곽씨]][[곽약사|(郭氏)]], [[인동 장씨|장씨]][[장문휴|(張氏)]], [[양규|양씨(楊氏)]], [[행주 기씨|기씨(奇氏)]](이쪽의 경우 1033년 11월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의 내투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기씨는 이미 후삼국시대 고려에 속한 호족으로 여러 명이 등장한다. 奇라는 한자의 단순한 음가상 고유어나 말갈식 이름을 음차하다 보니 우연히 그 한자가 쓰인 것일 수도 있고 발해에도 이전부터 기씨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내는 걸 수도 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637|오씨(吳氏)]] 등 여러 성씨들, 하물며 뿌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성본(性本)들이 발해계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씨(李氏)와 고씨(高氏)의 경우 일부 본관들이 정황상 발해인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늘날 [[남한]]의 1만 태씨(太氏)들만이 발해의 후손인 것은 실상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히 가장 수가 적었을 '''왕족만 1만'''이 넘는다는 걸 나타낸다.] * '''{{{+1 {{{#BDB76B 당나라}}}}}}''' 셋째로는 당나라 내부로 옮겨진 인구 중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집단으로, [[연개소문]]의 아들들 및 [[연비]] 등 그 후손들, 그리고 당나라 군인으로 활동한 [[고선지]]나 [[이정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으로 갈라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아 725년 당현종의 [[태산]] 봉선의식 때까지도 고구려와 백제의 구 왕족을 '고려조선왕'과 '백제대방왕'으로 형식상 존치시켜 당나라 경사(장안)에 거주시키는 등 내신지번으로 삼아 이용했다. 이들은 당에서 대를 거듭하고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사회에 동화, 중국인 집단으로 스며들었다.[* 연남생의 묘지명만 봐도 아무리 배신했다지만 본인은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의 증손자인 [[연비]]의 묘지명에는 스스로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 썼을 정도로 세대가 지나면서 차차 동화되는 정황이 나타난다.] 당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의 수[* [[자치통감]] 기준으로 최소 28,200여 호(戶).][* [[중국인]]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나 [[바이두]]에서는 약 40만의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이주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낭설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주 써먹는 역사왜곡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안동도호부]]의 영문 항목에서 약 78,000여 호(戶)가 끌려갔다고 하는 등 중국인 학자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용하면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다만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로 자의든 타의든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개는 유력한 민호 출신들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의 상당수가 [[청나라]]로 끌려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지배층 한정으로 본국으로 거의 대부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고구려도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의 사례처럼 당나라를 탈출한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이 말갈이나 신라로 피신했지만 조선과는 달리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 모두가 고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가 수인만큼 당시 고구려인들의 존재는 당 내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낳았다. 당나라의 내지 각지로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이용되거나 빈 땅을 채워 주민 사회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어 당나라 황실에서조차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당장 고선지나 이정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당의 팽창과 발전에 기여했고, 반대로 [[제나라|자치적인 항거 세력]]을 구축해 당 조정에 도전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처럼 상당수가 당에서 이탈해 [[발해]], [[신라]], [[말갈]] 등에 투화하였다. 그러나 탈주하지 못하고 당나라 내지에 잔류한 고구려 유민 다수는 타국의 피지배층이 된 이민족으로서의 궁핍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당나라의 문인인 장작(張鷟)이 지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평양성]] 출신의 절세미녀로 당나라로 끌려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정일(郭正一)의 종이 된 옥소(玉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곽정일의 독살을 시도하고 그의 전택(田宅)을 벗어나, 연인으로 추정되는 무명의 고구려인,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착마노(捉馬奴)라는 곽정일의 노비(본명이 아니라 마굿간지기라는 뜻)와 함께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나란히 참수당했다고 한다.] 당장 당나라 조정에 입신양명한 몇 안되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신하였던 왕모중도 처음에는 노비였다. 궁극적으로 당나라 내지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나 [[발해]]에 편입되었던 고구려인들과 달리 고구려인으로서의, 나아가 고구려의 유예(流裔)로서 최소한의 자각조차 없는 채로 [[한족]]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 '''{{{+1 {{{#B82647 잔류 고구려인}}}}}}''' 넷째로는 [[요동]] 및 [[평양]], [[평안도]] 지역에 계속 남은 집단인데 여기는 본래 황해도/평안남도와 함께 고구려의 삼경(三京)[* [[국내성]], [[평양성]], [[한성]].]을 이루는 핵심 지역[* 사실상의 수도권.] 중 하나였지만 [[수나라]]-[[당나라]]와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부흥군]], [[신라|신라군]]이 얽히고 설킨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신당서》에 의하면 나당전쟁까지 끝난 시점의 [[안동도호부|요동에는 늙고 빈곤한 자만 남겨두고(弱窶者留安東)]], 나머지는 당나라 내지로 가능한 이주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이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 사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특히 수도였던 [[평양성]]은 황폐화되었다.[* 다른 게 아니라 서해의 섬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 부흥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육지로 돌아온 뒤 전쟁 중 지나가면서 (아마도 그가 나고 살았을) 평양성 일대를 보고 폐허가 되고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고 슬퍼한 기록이 적혀있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기 전 시점으로 나당전쟁 이전에 고구려의 각 방어선이 무너지며 전황이 악화되자 이미 상당한 고구려인들이 이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로 강제이주 조치된 요동의 유력 민호들은 당나라의 관할에 들어간 항복한 11개의 성(城)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요동과 [[압록강]] 이북의 [[안시성]], [[요동성]], [[오골성]], [[신성]] 등 항복하지 않은 성(城) 11곳은 [[고구려부흥운동]]이 실패한 시점에서 [[신라]]에 귀부하거나 [[당나라]]에 의해 점거당했을 때 [[말갈]] 등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말갈]]로 탈출한 이들은 [[발해]]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과 평양성의 고구려 유민들은 거주 인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훗날 고려가 복원하기 전까지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평안도 일대의 고구려인들은 [[고려]] 왕조에 의해 수복되어 한국인의 원류에 합류하였지만 발해 멸망 당시 고려에 귀부하지 않았던 요동의 잔류 고구려계들은 이민족 치하를 거치며 [[만주족|만주]], 중국인 집단에 동화되었다.[* 이성계의 [[요동 정벌]] 당시 고려군에게 다시 귀부해 고국으로 돌아간 1만여 호(戶)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머지 전부라고 보아도 좋다.] * '''{{{#00BFFF 북방 초원}}}''' 다섯째로는 [[몽골]] 고원 방면 북방 유목민 사회인 [[돌궐|돌궐 제국]]으로 유입된 집단으로 [[고문간]], [[고공의]] 등이 이끌던 집단이 이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강토에서 먼 만큼 그 인구 비중이 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후일 고문간과 고공의 모두가 돌궐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에 망명할 때 규모가 모두 합해서 만여장(萬餘帳)[* 천막 만여 개의 규모.]에 달했음을 보면 적어도 일본으로 이주한 무리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돌궐 등의 초원 일대에서 생활하다가 당나라 측에 망명한 고구려 유민의 수만 합산한 경우이기 때문에 당나라에 귀부하지 않고 북방 유목민 사회에 잔류한 고구려인들도 상당수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당나라에 망명한 부류와 돌궐 등 북방 유목사회에 잔류한 부류 모두 현지에 동화되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몽골]] 고원 방면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대다수가 고구려의 내지(內地)나 핵심 거점 출신이 아닌 지리적으로 북방과 인접한 북만주 일대 성읍들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고구려의 주요 성읍 32곳 가운데 내미홀성(乃勿忽城)처럼 도망한 성읍이 7곳이나 되었으니 상술했다시피 [[몽골]] 등지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이들 도망한 성읍들을 출신으로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FFB6C1 왜국}}}''' 여섯째는 일본으로 이주해 간 집단으로, 《[[신찬성씨록]]》에서 52개의 고구려계 씨족이 확인된다.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됐지만 [[코마 후미야스]]처럼 일부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이 정체성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구려인 선조를 두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기린다는 의식에 가까운 것이다. 고구려인 선조들을 두었고 그들의 혈연적, 문화적, 의식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계승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과는 결이 180도 다르다.][* 몇몇 진짜(상당부분은 중화사상으로 인한 사칭이고 한국 토성(土姓)이지만 일부분은 진짜 중국에서 온 조상을 두고 있다) 중국계 본관 성씨의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옛 중국계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음과 같은 맥락이다.] [[고마 신사]] 등이 일본에 귀부한 고구려 유민의 흔적이다. 다만 지리적 여건도 여건이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상 위아래로 나당 연합군에게 공격당하는 고구려의 상황 때문에 일본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멸망을 전후로 적지 않은 수의 백제인[*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 다만 멸망을 전후로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들은 얼마 안 되며 이전부터 교류나 이주 목적으로 왜국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수가 더 많다.]과 가야인[* [[신라-왜 전쟁|고구려의 신라 구원]]과 [[가야멸망전|신라의 침공]]을 계기로 왜국으로 대거 망명한 가야인들. 가장 대규모로 이주했던 경우로 추정된다.]이 왜국으로 피신했을 때의 규모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