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백 (문단 편집) == 5천 결사대 논란 ==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해 성왕을 전사시키며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했다. 고립상태에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당]]과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이끌게 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 18만명(당군 13만명, 신라군 5만명)의 공격이 백제를 향하게 된 것이다. [[의자왕]]은 백제를 사수하기 위해 병력을 총동원하려 했지만 의자왕과 지방세력 간의 악화될 대로 악화된 관계[* 의자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으로 인해 백제 귀족세력과 의자왕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치달아 있었다.]로 인해 중앙 조정이 모을 수 있었던 병력이라곤 고작 5,000명뿐이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꽤 널리 퍼져있는 내용이다.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의 오래된 역사서에선 의자왕 말년의 향락과 사치 때문에 백제가 쇠락해서 군대가 5,000명 밖에 없었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http://www.changpogo.or.kr/upload_files/com/2.%EB%8B%B9%EC%9D%98%20%EC%B0%B8%EC%A0%84%EA%B3%BC%20%EC%9B%85%EC%A7%84%EA%B0%95%20%ED%95%B4%EC%A0%84.pdf|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괴멸시켰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 >'''《[[삼국사기]]》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의자왕'''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전군이 전멸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가운데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부상병, 포로, 패잔병 등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 밖에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의자왕이 진짜 막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주력군이 당군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 이러한 다른 기록이 생겼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통일 이후 신라가 당나라보다는 신라의 전공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켰거나, 혹은 관련 기록이 남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삼국사기 수록과정에서 당서 기록을 백제본기에서 수록해주었으니 충분했다고 보는 등의 수록과정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계백이 동원한 5천은 국왕이 즉각 자신의 권한으로 빼올 수 있는 직속군대여서 바로 급파하였고, 백강 방어전은 인근 지방세력과 5천 병력을 급파한 후에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꾸준히 투입되어서 보강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위의 지방세력과의 갈등 문제도 설명이 가능하다. 지방 병력의 동원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갈등으로 인해 동원이 지체되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자, 의자왕은 5천이라는 적은 병력이나마 국왕 직속 부대를 빨리 보내서 일시적으로라도 신라군을 저지하고 그 사이에 동원 시간을 벌어서 당나라 군을 막는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