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애왕 (문단 편집) == 생애 == 경애왕은 즉위 직후부터 시작해 거의 매년 북방의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다. 형인 [[경명왕]]이 [[궁예]]가 죽은 뒤에 [[920년]] 때 맺은 수호동맹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의도로 보인다. 태조 [[태조(고려)|왕건]] 역시 이에 화답해 경애왕 정권과 재위기간 내내 굳건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신라 [[멸망]]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외교]]에도 나름 공을 들이게 된다. 《[[요사]]》 <태조본기>, 926년 1월 항에 [[거란]] [[태조(요)|태조 야율아보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함락전 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해족|해]](奚), [[위구르|회흘]](回紇), [[토번]](吐蕃), [[당항]](탕구트), [[실위]](室韋), 오고 등과 함께 신라가 나오고 있다. 물론 당시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방비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형식적인 정도였거나, 또는 920년대 신라의 [[안보]] 상황을 감안하여 지지 선언 정도로 하고, 실제로는 도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삼국시대]] [[역사]]상 그런 사례가 한 둘이 아니기도 하다. 927년 2월에는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함으로써 [[중원]]의 국가와도 미리 친분을 맺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신라는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아예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남 진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반[[독립]] 세력인 [[왕봉규]]의 도움으로 남해안을 통해 [[중국]]의 중원으로 사신단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왕봉규도 덤으로 후당에 같이 조공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왕봉규가 비록 신라의 충신까진 아니라지만 경남 중부 해안 일대를 장악한 그를 견훤의 침략을 받아낼 [[탱커]] 역할이자 남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제3세력치곤 힘이 있었던 왕봉규도 [[고려]]와 [[후백제]]라는 [[고래]] 싸움에 껴서 [[새우]]등 터지듯 927년이 지나기도 전에 망하고 말았다.[* 말년에 잠깐 후백제에 붙었다가 고려군이 친히 때려잡았다.] [[한반도]] 내부에서도 경애왕은 이전에 [[방어]] 내지 [[방치]]에 가까웠던 신라 [[조정]]의 대응과 달리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선왕인 경명왕 때 후백제가 기어코 신라의 통제하에 있었던 천혜의 요새 [[대야성]]을 무너뜨리는 등 점차 서라벌의 숨통을 조여오자 막 건국된 신생국 [[고려]]의 [[태조(고려)|왕건]]과 굳건하게 [[동맹]]을 맺어두는 한편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하는 전선에 신라군을 파견해 고려와 같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후백제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는 등 제법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선왕 경명왕 시절에는 신라가 고려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신라군이 고려군을 도울 수도 있다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과거의 [[나제동맹]]과 같은 공수동맹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심지어는 고려가 후백제와 싸우다가 숨을 돌리기 위해 서로 왕실 종친([[왕신]], [[진호]])을 [[인질]]로 교환할 때도 경애왕은 견훤은 약속을 어기고 병사들을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벌을 줄 것이라는 등 그를 까는 글을 보내면서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워보자고 왕건에게 의견을 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적극적인 행보는 경명왕 시절 무력한 신라 조정에 등을 돌리려 했던 경상도 각지의 친신라 성향 호족에게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행했던 조치들로 보인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견훤]]은 격분했다. 과연 견훤은 지체없이 왕건과 경애왕의 허를 찌르는 [[복수]]극에 나섰다. 당시 상황은 고려군이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를 차지하고,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927년 고려-신라 연합군이 친후백제로 기운 [[왕봉규]]를 멸망시키고, [[추허조]]가 지키는 [[대야성]]까지 함락해 [[경상남도]] 서부까지 고려-신라 연합군이 이제 막 주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후백제를 포위한 형세 같았지만 두 지방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서부 방면은 아직 후백제 점령지가 많이 남아있었고 연합군의 대비도 허술했다. 물론 좌•우에 적의 대부대가 있는 상황에서 가운데를 뚫고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행동이었지만, 견훤은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들어가 신라의 심장부를 타격할 대담한 [[기습]] 계획을 세운다. 927년 9월, 왕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견훤은 반격을 위해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친정하여 전장에 나타났다.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문경시]] 인근)을 빼앗았다.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때 엉뚱하게도 견훤은 경북 북부로 진격하려던 것 같던 군사를 돌려[* 이는 견훤의 전략이라 볼 수 있는데, 근품성은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일대로 [[예천군]] 용궁면과 인접해있기에 왕건과 경애왕의 입장에서는 견훤이 근품성을 함락시킨 뒤 예천을 거쳐 안동(당시의 고창)이나 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 예상하고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견훤 본인은 좀더 쉽게 경주로 진격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고울부(高鬱府)([[경상북도|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서라벌 기습]] 작전을 시행했다. 견훤이 서라벌 레이드를 벌린 루트가 딱 현대 한국에서 [[상주영천고속도로]]의 경로이다. 순식간에 경주 옆인 고울부(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까지 후백제군이 다다르자 비로소 견훤의 목적이 오로지 서라벌이란 걸 알게 된 경애왕은 급히 왕건에게 지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왕건은 10,000명의 병력을 급파했지만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친정한 후백제군이 경주에 나타났고[* 당연한 소리지만 영천과 경주는 바로 인접한 지역인데, 이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있는 개성의 왕건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한다한들 병력들이 내려오는 사이 견훤은 경주로 방향을 돌려 왕궁과 수도를 뒤집어놓은 채 돌아가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견훤이 막 도착했을 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견훤이 급습하자 연회장은 난리가 났고 경애왕은 끝내 견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견훤의 기습 공격은 당시 상황에서는 엄청난 [[무리수]]에 가까웠다. 당시 후백제군이 정석대로 퇴로 및 보급로를 확보하며 진격한다는 전제하에 신라 지역을 공격하려면 [[문경]] 일대와 대야성이 있는 [[합천]]을 점령한 고려군의 협공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경애왕이 제대로 [[산성]]에서 농성하면서 오래 버티기라도 했다면 퇴로가 차단될테고, 왕건이 직접 지휘하는 북쪽 고려 본국의 구원군+대야성과 강주에 나가있던 남쪽 고려군 병력+고려군을 지원해 외지에 나가있던 신라군 병력이 집결하기라도 했다면 본국으로 돌아갈 길도 없이 협공당할 위험이 컸다.[* 결국 경애왕이 너무 빨리 당해서 견훤이 돌아가는 중에 공산(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뒤늦게 도착한 왕건의 [[고려군]]과 맞붙었는데, 여기서 왕건이 [[역대급]]으로 대패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개국공신 [[신숭겸]]마저 잃은 격전이 [[공산 전투]]이다.] 그런데 견훤은 이런 협공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단 문경 방어선을 뚫은 뒤 [[멧돼지]]처럼 우직하게 서라벌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러니 고려군과 신라군은 도저히 대응할 시간을 벌지 못했던 것. 견훤이 무리수나 마찬가지였음에도 기어이 전광석화처럼 서라벌을 점령할 수 있던 건 견훤 자신이 바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복무하던 군인 출신이니만큼 서라벌 일대의 지리와 신라군의 행동 반경 및 경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처럼 서라벌 군인 출신 장졸들을 대동하여 앞장 서게 했을 터이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겁탈]]했고 장군들은 [[첩]]들을 겁탈했으며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朴孝廉) 등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남아있다. [[서라벌]]을 침공한 견훤은 수도 [[경주시|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상당수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제껏 신라군이 고려와 대(對) 후백제 연합전선을 펼쳤던 것을 뿌리 째 뽑아버리기 위해 병기를 제작하는 기반 시설들까지도 철저하게 없애버렸고, 이런 참상에 자포자기한 서라벌의 많은 사람들이 서라벌을 떠나거나 수도 전주로 돌아가는 견훤을 순순히 따라갔다. 이후 경순왕 김부는 주도권을 되찾자 전왕 경애왕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나름대로의 직속 병력을 육성해서 고려군과 또 다시 연합 작전을 벌여 후백제를 저지하려고는 했지만 이때 입은 타격이 워낙 심각하여 다시는 공세 작전에 병력을 투입하진 못하고, 수세적으로 몰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왕건은 견훤의 선례를 상당 부분 참조하여, 아예 신라 왕궁 근처에 일종의 파견군 사령부를 설치해서 철저히 감시를 하는 한편 강원도로 통하는 길목에도 정예 부대를 남겨둠으로써 경순왕이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 있는 친신라 성향 호족들과 연결을 못하게 면밀히 감시했다. 경애왕 때까지는 고려와 신라가 신라가 명분상 우위에 있는 대등한 동맹관계였으나, 경애왕 살해 후의 신라는 고려가 신라 왕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호족들과 통신하면서 군부대 또한 제멋대로 배치하는데도 한마디 항의조차 못하게 된다. 이는 고려가 무력화된 신라의 처지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저항력을 철저히 무력화하는 욕먹을 짓은 견훤이 다 해줬기에, 왕건은 가만히 앉아서 이득만 누리면 되었다.] 경애왕의 두 아들은 인질로 견훤이 데리고 갔는데, 장남 금성대군 박교순(交舜)의 후손 박윤웅은 울산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으며, 차남 계림대군 박순현(舜玄)[* 다른 이름으로는 입순(立舜) 혹은 수현(受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겁탈당했다는 경애왕의 왕비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자식들과 끌려갔거나 치욕감에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후자를 택했다.] 견훤은 3대를 이은 15년 동안의 박씨 왕실을 무너트렸지만 신라 국체를 완전히 끝내진 않고,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인 김부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 철군하니 그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 <[[효녀 지은]] 설화>로 잘 알려진 화랑 [[김효종(신라)|김효종]]의 아들이다.] [[고려]] [[태조(고려)|태조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을 현재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인근인 공산에서 따라잡았고, 치열한 혈전인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왕건은 여기서 개국공신 [[신숭겸]]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살아나 단신으로 도망치는 대패를 당했고,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다. 현재 [[대구광역시]] 전역에 많이 있는 [[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왕건과 관련된 지명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사실상 [[후백제]]로서는 이때가 가장 절정기였었고,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 라고 패기있게 국서를 보냈던 것이 이때 있었던 일이다.[* 이 글은 후백제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신라삼최]]의 일원이었던 [[최승우]]가 지었다고 전한다.] [[경애왕릉]]은 본인이 일생을 마친 포석정에서 멀지 않은(1.5km 정도 남쪽) 남산 자락에 있다.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시기에 조성된 능인 만큼 소박한 편이고, 능 주변의 숲이 볼만하다. 경애왕릉 바로 옆에 [[삼릉]]이라는 3명의 박씨 선대왕들의 릉이 위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