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제국대학 (문단 편집) === 제도 도입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구제고등학교)] 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일본제국]]의 학제는 [[소학교]]-[[구제중학교|중학교(구제)]]-[[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구제)]]/[[대학예과]]-[[구제대학]](본과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래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은 모두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에 진학이 가능했다. [[대학예과]] 역시 졸업하면 대학 학부로 진학이 가능하였으나, 오늘날 의예과와 같이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소속 대학 본과에 진학(무시험 최우선 입학)할 수 있다는 점이 고등학교와 다르다.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도쿄·교토·도호쿠·규슈와 달리 예과 제도를 채택했다. 이는 바로 앞서 다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국대학]]의 예를 본딴 것이었는데, [[제국대학]]이 설립되는 1918년 당시의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제고교인 다이호쿠고등학교(臺北高等學校)가 설치되어 있었던 1928년 [[일제강점기(대만)|대만]]에 설립된 [[다이호쿠제국대학]]은 부속예과 없이 2학부[* 문정학부, 이농학부]만 두었다. 반면 [[구제고등학교]]가 없었던 조선에 [[제국대학]] 학부만 설립될 경우, 조선인들과 재조선 일본인들은 일본·대만·관동주 등 타 지역의 구제고교로 진학하여 졸업해야만 경성제대에 입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일본 제국]] 전역에서 진학열이 폭발하던 [[다이쇼 시대]]로, 1918년 12월 대학령 공포와 함께 고등학교령이 개정된 후 일본 각지에 [[구제고등학교]]가 증설되어 고교 졸업생 숫자가 전체 제국대학 입학정원을 초과하면서 지원이 몰리지 않더라도 학부 입학 탈락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구제고등학교#s-1.2|참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본제국 문부성은 당초 문과계열 학부 설립을 계획하지 않았던 도호쿠와 규슈의 제국대학에 법문학부를 설치해서 정원을 늘리고, [[관립대학|관립의과대학]]들 역시 별도 예과 설치없이 구제고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시행하도록 했다.] 1918년 제2차 고등학교령 공포 전까지 이른바 '[[구제고등학교#s-3.1|넘버스쿨]]'이라 불린 제1~8고교만 존재했는데, 고등학교령이 개정된 후인 1919년부터 1923년까지 18개의 '[[구제고등학교#s-3.2|네임스쿨]]'이 개교했으니[* 참고로 구제고교별 정원은 큰 차이가 없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에 [[제국대학]]이 신설되더라도 내지에서 구제고교를 졸업한 일본인들이 쇄도해 조선인과 재조선 일본인들의 경성제대 진학 가능성이 낮을 것이 우려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1919년부터 대학 설립을 추진해온 조선총독부는 1921년 1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 1차 심의에서 '대학과 '''대학예과'''는 내지의 제도에 준거한다'고 하여 이미 [[구제고등학교#s-3.3|제국대학예과]] 형태로 설립할 것임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설립으로 조선에 앞서 1918년 [[제국대학]] 승격이 이뤄진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삿포로농학교의 '예수과(預修科)'를 모체로 제국대학예과를 설치했던 것을 참고하여, 조선총독부는 [* 조선인이 [[구제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우수한 인재를 경성제대에 묶어두기 위해 구제고교 대신 예과 형태를 채택했다 설명해온(정선이,「경성제국대학 연구」, 문음사, 2002) 과거 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조선인의 내지 대학 진학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수치로 간단하게 반박된다. 1942년까지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이 629명인 데 반해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784명에 이르고, 정식 학사를 받지 못했던 선과생이나 전수과 그리고 위탁생과 학업 중도포기자를 합하면 1,000명을 훌쩍 넘기는 조선인이 내지의 제국대학에 유학했음을 알 수 있다(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후머니타스, 2017.).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사립대학들을 제외하고도 내지의 제국대학에 진학한 조선인 수만도 경성제대를 압도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 [[구제고등학교#s-3.3|경성제대 예과]]를 졸업하고나서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사례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한정된 경우지만 경성제대 예과를 통해 일본 내지로 진학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종현의 연구에 따르면,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236명의 출신 [[구제고등학교]]를 보면 경성제대 예과와 홋카이도제대 예과를 졸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경성제대 예과, 홋카이도제대 예과, 다이호쿠제대 예과 등 [[구제고등학교#s-3.3|제국대학예과]] 3개교도 [[구제고등학교#s-3.2|넘버스쿨(番號校)]] 8개교, [[구제고등학교#s-3.4|네임스쿨(地名校)]] 19개교 및 [[가쿠슈인|학습원]] 고등과 등과 함께 관립 31개 '''구제고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설령 제국대학 입시에서 경성제대 예과가 내지의 구제고교 보다 후순위였다 가정하더라도, 구제고교 졸업예정자 대상 입시에서 마감되는 인기학부(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기타 제국대학의 의학부 등) 진학은 불가능했겠지만 구제고교생 대상 입시가 미달나서 [[구제전문학교]]인 [[고등상업학교]] 및 [[고등사범학교]] 졸업생이 다수 입학하던 대부분의 비인기 학부에는 입시를 거쳐 입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총독부는 내지로부터 유입되는 일본인들로 인한 경쟁을 낮추기 위하여 예과 1회부터 입학시험 시행일을 내지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 날짜와 동일한 1924년 3월 18일로 잡았다.[* 이는 신설 대학이 반드시 제국대학이 되어야 하며, 그 예과는 구제고교에 준해야한다는 총독부의 입장이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문부성과 제국의회는 단과 [[관립대학]] 설립에 그치려고 했던 것을 조선총독부가 명칭에서 양보(조선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하면서 끝까지 제국대학령에 의거한 제국대학으로 설치할 것을 관철시켰다.「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쪽.][*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에서는 부속예과 형태를 택하게 된 또다른 이유로, 경성제국대학관제의 법제국 심사와 추밀원 심의 등 경성제국대학 설립 작업의 막판까지도 제국대학령에 근거한 [[제국대학]]이 될 것인지 대학령에 근거한 [[관립대학]]이 될 것인지 반발과 논란이 있었을 만큼, 제국대학으로 추진하던 조선총독부도 자신들의 입장이 내각에서 관철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관립대학으로 낙착되더라도 적용이 가능한 예과 형태를 준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에도 '고등학교'가 아니라 '제국대학예과'가 설치되는 데 논란이 있었으나,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국대학]]에만 존재하던 생소한 제도라 일반에 생소했기 때문이었으며 경성제대 초대 예과부장 오다(小田省吾)는 인터뷰에서 '2년 동안 이수하는 학과목이나 그 관제는 물론 예과부장, 교수, 조교수, 생도감 등의 제도와 설비와 편성, 교원, 교과서 등은 모두 대학령에 의거한 고등학교 고등과의 규정을 습용한 것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내지의 고등학교의 그것들과 동일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경성제대 예과는 내지에서 매해 진행된 [[구제고등학교]]들간의 정기교류전에 초청되어 참가했으며 다른 구제고교들과 일대일로 구기종목 인터하이를 치르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한 구제고교 38개교(관립 31개교)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구제고등학교]] 자체가 [[제국대학]]의 [[대학예과|예과]] 성격으로 출발한 학교로서 1918년 고등학교령의 개정 이전까지 전문학부[* 의학부, 공학부 등]가 아닌 제국대학 진학준비반의 명칭이 '''대학예과'''[* 1918년 개정 고등학교령에서 고등과로 변경.] 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당연한 것이다. 제국대학으로 진학이 보장된 고등학교는 관립은 물론이고 공립(3개교)와 사립(4개교. [[리버럴아츠 5학원|참조]])까지 모두 구제고교로서 인정받았으나, [[관립대학]] 예과 3개교는 대부분의 경우 포함되고 있지 않으며[* 간혹 여기까지 포함해서 41개교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는데 극히 드물다. 제국대학의 예과로 기능했다는 구제고교의 특성에 해당하지 않기도 하고.] [[공립대학]] 예과와 [[사립대학]] 예과는 자칭 '''고등학교'''의 명칭을 썼을지언정[* [[와세다대학]]의 예과는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구제고교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제국대학예과'''는 각 제국대학에 부속된 기관이었기 때문에 예과를 수료하고 타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려는 학생은 사유서를 써서 예과부장의 허가를 득해야 했다([[https://www.law.go.kr/LSW//lsInfoP.do?lsiSeq=67293&ancYd=19240502&ancNo=00021&efYd=19240502&nwJoYnInfo=N&efGubun=Y&chrClsCd=010202&ancYnChk=0#0000|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 제18조 참조)[* ①학생은 예과부장의 허가를 얻지 아니하고는 다른 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②전항의 허가를 얻고자 하는 자는 사유서를 구비하고 보증인과 연서하여 출원하여야 한다.]. 경성제대 예과에 있어 실제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예과''''의 형식이 아니라 그 수학연한이었다. 3년제였던 내지의 구제고교들과 달리 1924년 개교 당시 경성제대 예과는 2년제로 출발했는데, 이 때문에 경성제대 예과의 위상이 내지의 구제고교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인식이 있었고, 1934년 제11회 신입생부터 경성제대 예과는 내지의 구제고등학교들과 동일한 3년제로 개편되었다.[* 경성제대 예과의 수학연한은 1943년 일제가 [[구제고등학교]]를 2년제로 단축함에 따라 2년제로 단축된다([[https://ja.m.wikipedia.org/wiki/%E6%97%A7%E5%88%B6%E9%AB%98%E7%AD%89%E5%AD%A6%E6%A0%A1|일본어 위키백과]] 참조. 1942년에 임시조치로 3년을 2.5년으로 단축하고, 1943년부터는 2년제로 단축). 이 때는 총력전을 위한 국민총동원 체제로 가면서 [[일본육군사관학교]](본과 2년 과정이 1938년 1년 8개월, 1941년 1년으로 단축), [[일본해군병학교]](3년 8개월 과정이 1941년 2년 4개월로 단축) 등 사관학교부터 [[구제전문학교]]와 관공립/사립을 막론한 [[구제대학]]까지 모든 학교들이 구제고교와 마찬가지로 수학 기간이 단축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일본 정부가 시행한 학제 개혁안(상세내용 [[구제고등학교#s-2.3|제2차 고등학교령]] 참조)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18년 대학령과 함께 공포된 [[구제고등학교#s-2.3|제2차 고등학교령]]에서는 대학예비교육을 행하던 구제고교를 '남자의 중등교육을 완성하는 기관'으로 변경함과 동시이 고등학교 본과의 명칭을 '''대학예과'''에서 '''고등과'''로 개칭하며 5년제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4년)와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과(3년)를 통합한 '''7년제 고교를 기본'''으로 두고, '''예외적으로 고등과로만 구성된 고교도 가능'''하게 해 기존의 3년제 구제고교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그러한 3년제 고교 입시의 응시자격을 기존의 구제중학교 5년 졸업생에서 4학년 수료생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도쿄고교, 다이호쿠고교 등 관립고교 2곳을 포함해 도야마고교, 나니와고교, 부립고교 등 공립 3개교 및 무사시고교, 코난고교, 세이케이고교, 세이조고교 등 사립 4개교는 전부 7년제로 신설되었고 기존 3년제 기존 구제고교들도 중학교 4학년에게 입시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대학령 제13조는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은 3년 또는 2년으로 한다'''"고 규정하면서 '''"수업연한 3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 제4학년을 수료한 자"로 그리고 "수업연한 2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를 졸업한 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인터뷰에 따르면 내지의 [[구제고등학교]]가 구제중학교 4년 수료자에게 입학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한 것과 다르게 경성제대 예과 입시는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포함) 5년 과정을 마친 졸업생을 대상으로 실시되므로 2년제로 개교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학제개혁안은 정착되지 못해서 7년제 관공립 고교들이 대부분 오히려 심상과를 폐지하고 3년제 고교로 변화하게 되고, 4학년 수료생이 고교입시를 통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내지의 7년제 구제고교들이 3년제로 이행하는 시점인 1934년에 경성제대 예과도 3년제로 개편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