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건축물 (문단 편집) === 침전 권역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강녕전.jpg|width=100%]]}}} ||'''[[경복궁 강녕전|강녕전(康寧殿)]]'''[br]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강녕전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내전 권역이 소실되자 [[1920년]] 이건되어 [[창덕궁 희정당]]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연생전_전경.jpg|width=100%]]}}} ||'''[[경복궁 연생전|연생전(延生殿)]]'''[br]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경성전.jpg|width=100%]]}}} ||'''[[경복궁 경성전|경성전(慶成殿)]]'''[br]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ha.go.kr/1624504.jpg|width=100%]]}}} ||'''[[경복궁 연길당|연길당(延吉堂)]]'''[br][[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응지당.jpg|width=100%]]}}} ||'''[[경복궁 응지당|응지당(膺祉堂)]]'''[br][[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교태전_전경.jpg|width=100%]]}}} ||'''[[경복궁 교태전|교태전(交泰殿)]]'''[br]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대화재로 내전 권역이 소실되자 [[1920년]] 이건되어 [[창덕궁 대조전]]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아미산_굴뚝_전경1.jpg|width=100%]]}}} ||'''[[경복궁 아미산|아미산(峨嵋山)]]'''[br]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 다만 이 설은 잘못된 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교태전 자체는 세종 때 만들어졌고 경회루 연못을 판 것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이기 때문]으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경복궁까지 이어서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들에게 백두산의 기를 주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선장문 안쪽의 실제 아미산 영역은 출입불가이며 입구 계단인 아미산 굴뚝 주변도 올라갈 수 없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흠경각.png|width=100%]]}}} ||'''[[경복궁 흠경각|흠경각(欽敬閣)]]'''[br]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년)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관측 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함원전.jpg|width=100%]]}}} ||'''[[경복궁 함원전|함원전(含元殿)]]'''[br]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AKR20150216051700005_01_i.jpg|width=100%]]}}} ||'''[[경복궁 소주방|소주방(燒廚房)]]'''[br]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대전(大殿)의 음식을 만들던 곳이다.[* 북궐도형 등의 자료를 보면 처소마다 소주방이 따로 있다. 한자로는 수자간이라 음차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2015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방, 궁중 음식을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2018년 현재, 궁중 다과와 전통차를 판매하는 찻집으로 개수되어 운영 중에 있다.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경복궁 내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실내에 들어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각이라는 점에서도 경복궁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