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동(구미) (문단 편집) == 역사 == 전통적으로 [[칠곡군]] 인동면의 역사와 거의 같이 한다. 구미 강동의 전신이 인동면이 [[구미시]]에 편입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인동(구미)|인동]]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불가능하다. 선사시대의 중요한 국가적 유물인 사적 선산 낙산리 고분군이 여기서 발견되었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경주시]]와 함께 [[불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사찰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불교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도리사]]가 이곳에 있기 때문. 그 후 도리사의 부근에 새롭게 지어진 보천사도 존재한다. 인동(仁同) 이라는 지명을 보듯, 인(仁)과 의(義)에 관련된 사례들이 상당히 많다. 우선은 '''의우총'''과 '''의구총'''이 존재하는데, 특히 의구총의 일화는 들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아!할 정도.[* 어느 날 개와 산책을 하던 사내가 술을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잠들었는데, 이때 주변에 불이 발생해 갇힌 신세가 된 주인을 개가 강가로가 물에 몸을 적셔 불을 끄고 자기는 끝내 지쳐 죽었다는 이야기. 충직하고 의로운 개라고 하여 무덤까지 만들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이런 류의 이야기는 [[전라북도]] [[임실군]]의 오수 의견 설화가 더 잘 알려져 있다.] 향교와 서원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작은 규모의 고을은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다. 특히 선비들이 많아, 반월당 김종효가 이 곳으로 들어와 자신의 호를 딴 반월당 서당을 열어 많은 선비들이 찾아왔다고 알려져있다. 이 때문에 과거엔 여길 문사가 많은 동네라고 하여 문림동(文林洞)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글을 배우는 선비들이 많은 동네라는 뜻. [[리쌍]]의 멤버 [[길성준]]과 [[길라임]](...)으로 유명해진 '''해평 [[길씨]]'''가 이 곳 해평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사실 그 3은으로 한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야은''' [[길재]]가 바로 길씨 출신이다. 동시에 [[해평 윤씨|해평 '''윤씨''']]도 이 곳이 본관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바로 해평 윤씨.[* [[금오산]]의 전설에 따라 구미시 지역에 3명의 왕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된 바 있는데, 짧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도 여기에 속하기도 한다. 다른 한 명은 한국 사람이라면 좋든 나쁘든 알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6.25 전쟁]]의 동양의 [[베르됭 전투]]로 평가받는 [[다부동 전투]]의 배경이 된 곳이며, 해평동과 칠곡군 석적읍의 남율동, 주 전장이던 [[가산면(칠곡)|가산면]] 다부동에서 격전이 발생하였다. 행정상 구역은 다르지만 갈수록 시가지가 확대되어 사실상 [[칠곡군]] [[석적읍]]과 [[가산면(칠곡)|가산면]]을 흡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 단, 인동과 석적읍 사이에 3공단이 있고, 인동 시가지는 인동 너머 가산면까지 뻗어있지 않아, 지도상에서는 시가지가 붙어있지 않다.] 칠곡군과 광역환승제가 도입되면서 [[구미시 시내버스]][* [[구미 버스 10, 110|10번, 110번(좌석)]] 등]가 칠곡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동명면과 왜관읍 등지에서 [[대구광역시 시내버스]]와 환승도 가능하나 할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24년 [[대구권 광역철도]] 개통에 맞춰 [[대구권 광역환승할인]]이 이뤄질 예정이다. [[인동(구미)|인동]]의 역사에 대하여서는 별도로 저 항목을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