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오개혁 (문단 편집) == 배경 == *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청나라는 1894년 5월 5일 군대를 아산만에 파병한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톈진 조약]]의 규정을 빌미로 5월 6일 일본군도 파병한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5월 7일 [[전주 화약|화약]](和約)을 맺은 다음 청·일 양국에 퇴군을 요구 했으나 청과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다음날인 5월 9일 2차 본진을 인천으로 파병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개혁을 권고하고 있었고 6월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3차례 노인정[* [[민영익]]의 별장이다.] 회의에서 내정 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면서 이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 조선에서는 일본의 요구를 주권 침탈로 받아들이고 이를 거부한다. 대신 6월 11일 동학농민군과 화약에 따른 개혁기관으로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체적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11_001|교정청]] 일본은 6월 21일 새벽에 기습을 감행하여 전투 끝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서울 내의 조선군 병영들[* 신식 군대인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도 공격하여 이들을 제압하고 무기, 탄약을 모두 빼앗아 사실상 수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 9월 20일 약 3개월 만에 강제사임되어 은퇴한다.]을 불러들여 흥선대원군을 [[섭정]]에 앉혀놓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정부(제1차 김홍집내각)를 만든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2_003|#]] 이후 6월 23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위 문단에 나온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 7월 27일(음력 6월 25일), 김홍집 내각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김홍집]]이 총재관을 겸임하였으며 위원 17인과 서기 2인을 두었다. 그해 12월까지 군국기무처에서 200여 개의 각종 안건들이 통과되었다. 이 군국기무처는 얼굴 마담인 [[흥선대원군]]은 물론 고종도 간섭할 수 없는 초정부적 기구였으므로 사실상 독재나 다름없었다. * 1차 갑오개혁 후 흥선대원군이 실각되고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가 소환되어 2차 김홍집 내각을 설립하였다. 2차 갑오개혁으로 [[의정부]]를 개편한 [[내각]]이 설치되고 개혁 작업이 계속 추진되었으나, 1895년 3월 29일(음력)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이 일어나 일본의 영향력도 일시 축소되었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시해 음모 혐의로 일본으로 추방되며 개혁이 중단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