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3년 (문단 편집) == [[참여정부]] 출범과 정치사의 세대교체 == || [[파일:김대중 대통령 퇴임.png|width=100%]] || [[파일:노무현 대통령 취임 2.png|width=100%]] || ||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관련 뉴스(2월 24일) ||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관련 뉴스(2월 25일) ||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은 한국 정치사에서 일종의 세대교체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오랫동안 민주당계의 주류였던 [[동교동계]]가 아닌 비주류인 [[민주계|꼬마민주당]] 출신 인사의 당선이었으며 한국 정치인 중 최초로 '''인터넷 팬클럽'''을 가진 대통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을 기점으로 양당의 이념적 차이가 뚜렷히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삼김시대|삼김 정치]]로 일컫어지는 보스 정치와 지역주의 정치가 어느 정도 완화된 모습을 보인것도 있다. 이 때문에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언론에서는 노무현을 '''신세대 정치인'''으로 평가한 바 있다.[* 다만 2003년까지는 [[민주계]], [[민정계]], [[동교동계]] 등 정당 내 기존 계파들이 힘이 여전히 강력했고 [[김종필]] 등 중진 정치인들이 여전히 현역이었던 시절이라 완벽한 세대교체라고 말하긴 무리가 있다. 엄연히 노무현이 정권을 잡았다지만, [[새천년민주당]] 내 친노계는 여전히 동교동계와 대립하는 관계여서 주류로서 제대로 된 파워를 행세하지 못했다. 결국 2003년 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며 친노 세력이 떨어져나갔고, 이듬 해 총선에서 탄핵 사건의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1당을 차지하고 기존 중진 정치인들이 줄줄이 은퇴하면서 완벽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허나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여러 과제에 휘말렸다. [[이라크 전쟁|이라크 파병]] 찬반논란을 비롯해 [[불법 대북송금 사건|대북송금 특검]], 불법 대선자금 수수, 한총련 합법화, NEIS 파동, 노동계와의 갈등[* 배달호, 이용석, 김주익, 이경해 등 노동자/농민들이 잇달아 자살을 택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이 때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 는 입장을 냈고 이에 노동계가 강력히 반발하기도 했다.], 송두율 사건 등 여러 정치/사회적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당내에서 친노와 동교동계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결국 친노 인사들이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동교동계와 결별하게 된다.[* 이 때 노무현도 민주당을 탈당했다. 다만 열린우리당 입당은 이듬 해 5월에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이혼률이 역대 최대치를 찍은 해이기도 했는데, 이는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카드 대란]]의 여파가 컸기 때문이다. 카드대란의 여파로 LG카드는 이 해 부도를 맞는다. [[서울특별시]]에서는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었다. [[이명박]] 시장 취임 1주년에 시작된 복원공사는 2003년 8월에 끝났으며, 이 후 1년 6개월동안 하천 복원 등의 절차가 진행됐다.[* 공사 시작 2년 뒤인 [[2005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또한 2003년 9월부터 [[금강산]] 육로관광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버스편으로 금강산에 갈 수 있게 되었으며, 육로관광 개시로 기존의 해로관광은 2004년 1월 종료되었다. 다만 육로관광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수사를 받다가 같은 해 8월 4일, 현대 계동사옥 회장실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중국에서는 이 해 3월, 장쩌민 국가주석의 퇴임과 동시에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다만 주석 자리는 물러났지만 공산당 군사위원회 서기 직은 2005년까지 2년을 더 맡았다.] 그러나 후진타오 주석의 임기가 시작된 이 해에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중 관계의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종합적으로 볼 때 2003년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논란만 빼면 큰 이슈가 된 사건이 유독 없었고, 임펙트가 별로 없는 시기로 기억된다.[* 물론 앞뒤 해인 [[2002년]]과 [[2004년]]에 워낙 큰 사건들이 많아서 그 중간에 낀 2003년이 상대적으로 뭍힌 감도 없지 않다. 2002년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월드컵에서의 4강 신화]]와 대통령 선거 등 재밌고 임펙트 있는 사건들이 많았지만 2004년에는 안 좋은 일들만 여러차례 터졌다.] 영화를 제외한 방송/문화계도 불황이었고, 여름에는 초대형급 태풍과 겨울에는 폭설이 오는 등 날씨도 영 좋은 분위기를 내지 못했다. 다만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하면서 한국 사회에 가진 [[안전불감증]]에 큰 경종을 울렸다. 화재 자체는 방화범 [[김대한(범죄자)|김대한]]의 방화로 일어났지만, 여러 안전 메뉴얼이 부재하면서 결국 '''343명의 사상자'''를 낳은 최악의 참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철도안전 시스템이 대대적으로 개혁되었고[* 참사 이듬 해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의 모든 지하철 객차 내 시설을 불연재로 바꾸었고, 비상시 대피 요령을 전동차에서 승객들에게 수시로 안내하는 것으로 메뉴얼이 바뀌었다. 또한 전국 지하철역 내 비상등과 비상 타일 등이 대대적으로 교체되어 화재 상황에서 승객들이 쉽게 경로를 파악하고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이 사고 이후에도 여러 모방범죄가 있었지만 대형 참사로 번지지 않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한국의 건축 안전 매뉴얼을, 교육계의 안전불감증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가 대대적으로 변화시킨 것과 동일한 과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