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7년 (문단 편집) === 문민정부의 지지율 하락과 위기 ===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3-00_01040507.jpg]]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손을 맞잡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의 모습 1993년부터 온갖 대형사고와 비리사건으로 지지율이 내리막을 치닫고 있던 김영삼 문민정부에게도 이 해는 레임덕의 극치였다. 과거사 청산과 부정부패 사정, 하나회 해산, 금융실명제 등으로 집권 초반 지지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김영삼 정부였지만, 94년 3분기부터 50% 밑으로 내려간 뒤 지속적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더니[* 다만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는 1995년 8월 15일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일본놈들 버르장머리 고치겠다'는 얘기는 그 뒤인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의 방한 때 일본의 망언에 대해 한 발언이다. 그리고 이 해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했으며, 이후 다시 상승하여 1996년대 상반기에 40%대를 회복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선전할 수 있었지만 곧 임기가 1년밖에 남지않은 시점이 되자 다시 20%대로 떨어졌다.] 1997년 정초에 들어서 [[1996년 노동법 날치기|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재개정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리어 한보 사태와 아들 [[김현철(1959)|김현철]] 스캔들로 김영삼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또 노동법/안기부법 파동과 김현철 스캔들은 1차적으로 당시 당 대표인 [[이홍구(정치인)|이홍구]]를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중도 하차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민주계의 좌장격이던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당 대표로 지명된 것이다. 이회창 대표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김영삼의 레임덕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또 그해 연말에 외환위기까지 찾아오면서 김영삼은 후계 구도에서까지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우울해하던 김영삼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끌어내리게 만들었다. 일찍이 찾아온 레임덕 때문에 15대 대선에 영향력을 별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숱한 문제들로 인해서 비난이 가중되어 있기는 하나, 문민정부의 개혁과 사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외환위기가 싹 걷어가 버렸다. 외환위기는 이미 1996년 말 외채가 1천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그 조짐이 보였지만, 정부의 안이한 늑장대처와 기업의 계속된 차입,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로 1997년 11월에 이르러 결정적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오히려 김영삼은 "내부적으로 위기 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로 위기를 감추자는" 식의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여기에는 경제 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역시 국정 통솔자로서 비난을 면키가 힘들었다. 이로써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제공케 해 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IMF 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 향해졌다. 이렇게 해서 집권 초기 90%대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아예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김영삼 퇴임 이후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 2위는 전두환 전 대통령. 반면 '존경받아야 될 인물' 1위로는 백범 [[김구]] 선생, 2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 그 뒤는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이 뒤를 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31700209114008&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3-17&officeId=00020&pageNo=14&printNo=23823&publishType=00010|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시기는 우루과이라운드와 WTO 체제의 등장으로 직면되는 세계사적 전환기로서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숱한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이자 위기와 기회를 내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 위기를 기회로 살리지 못해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고 자신은 파멸이란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