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대 (문단 편집) ==== 정치 ==== 1989년부터 동구권 및 소련이 몰락하자 미국은 초강대국이 됐지만, 경제난 때문에 구 공산권 국가들을 물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적극 도와주지 못한 채 미국에 도전하는 또 다른 세력들과 쉴새 없이 싸워야 했다. 1990년에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이라크가 중동의 석유자원을 차지한다는 야심을 보여 페르시아만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미국을 도발했다. 이에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이 석유자원을 되찾고자 영국, 프랑스, 한국, 독일 등을 끌어들여 다국적군을 결성하고 이라크에게 쿠웨이트 철수를 요청했지만 후세인은 이를 씹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전쟁을 선언했고,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이 사우디로 모인 뒤 노먼 슈워츠코프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최첨단 무기와 미국인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1991년 2월 28일에 이라크군을 굴복시켰으나, 후세인 대통령을 처단하지 못했다. 걸프전 승리로 부시의 지지율은 91%까지 올랐으나 1990년부터 시작된 불경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져 서민들과 중산층들이 부시에게 등을 돌렸고, 1992년 초에는 부시 대통령이 방일 중 졸도하는가 하면 로스앤젤레스 인종폭동으로 국가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이 상황 속에서 민심은 경제 회복을 앞세운 '아칸소 촌뜨기'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기울었으며, 클린턴 후보는 국방예산 감축, 중산층에 대한 세금 감면, 러시아 및 CIS 국가들에 대한 경제원조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11월 대선 초반에 지지율 89%를 달성했으나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가 부시의 표 19%를 잠식해 43%라는 득표율로 겨우 당선됐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주변의 우려와 정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IT산업 활성화로 경제가 호경기를 맞아 국민들의 사랑을 무한정으로 받았으며,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바꾸거나 여성에게 고위직을 대폭 개방하는 등 인권 향상과 정치정의 향상에도 기여했다. 사회적으론 가정법을 개선해 여성의 권익을 더욱 보호하며 환경보호를 촉진했고, '범죄 삼진아웃제'를 마련하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국방 면에선 불필요한 외국 내정간섭을 자제하고 1992년부터 터진 보스니아 내전에 나토군을 투입한 후 내전을 제어시켜 '세계경찰' 포스를 보여줬고, 1994년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특사로 보내 북한의 도발을 누그러뜨리고 제네바 협정을 맺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1995년 말에 1996년 예산안을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자 정부가 파업을 하는 이례적 사건이 터졌고, 1996년 중간선거 들어서 밥 돌이 이끄는 공화당이 당선되면서 사생활 논란 등에 시달렸으며 부동산 스캔들 '화이트 워터게이트'까지 터지는 악재가 있었다. 11월 대선에선 로스 페로와 콜린 파웰 같은 제3의 후보 등장 이야기가 나왔으나 이들은 전부 출마를 포기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49%라는 저조한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밥 돌 공화당 후보를 꺾어 재선에 성공했다. 2기 재임기 때도 순탄치 않아 1998년에 모니카 르윈스키 및 폴라 존스 스캔들이 터진 데다 클린턴 대통령 역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추적으로 궁지에 몰렸으며, 청문회에서 그가 거짓말을 한 게 밝혀지자 1999년 2월 탄핵 위기까지 갔다가 상원에서 부결돼 대통령 자리를 겨우 지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