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894년 (문단 편집) === 실제 === * [[1월 4일]]: [[프랑스 제3공화국]]과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 [[2월 14일]](1월 9일): 당초 익산 군수로 전출될 예정이었던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다시 부임하였다. 이는 지난 1년 동안 조병갑의 가혹한 착취에 시달렸던 고부 농민들에게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고, [[전봉준]]은 지난해 11월에 계획했다가 보류시켰던 봉기를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 [[2월 15일]](1월 10일):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봉기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점거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 [[3월 12일]](2월 15일): 조정에서 고부 민란 수습책으로 조병갑을 경질하고 용안 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 군수로 임명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1854)|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도와 봉기 가담자들을 탄압하였고, 이러한 탄압은 결국 2차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 [[3월 25일]](2월 19일): 제2차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 [[3월 28일]](2월 22일):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김옥균]]이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 [[3월 31일]](2월 25일): 전라도 순천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 [[4월 3일]](2월28일): 전라도 영광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 [[4월 6일]](3월 1일) * 전봉준이 이끄는 수백의 농민군이 줄포(현 부안군 줄포면) 전운소를 습격하여 세고(稅庫)를 파괴하였다. *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위해 평양에서 [[광성중학교]]를 개교함. * [[4월 8일]](3월 3일): 신임 고부 군수 박원명이 부임하여 수습책을 발표하자, 농민군이 해산했다. * [[4월 11일]]: [[영국]]이 [[우간다]]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 [[4월 16일]](3월 11일): 충청도 황간, 영동, 옥천, 보은 등지의 동학도들이 봉기하였다. * [[4월 17일]](3월 12일): 전라도 금산[* 1963년 이전까지는 전라도였다.]에서 동학도들이 봉기하였다. * [[4월 21일]](3월 16일): 농민군,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현 고창군 공음면)에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 [[4월 25일]](3월 20일): 무장에 집결한 농민군이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고 봉기하였다(무장기포). * [[4월 28일]](3월 23일): 농민군이 고창, 흥덕을 거쳐 고부 관아를 점거하였다. * [[4월 30일]](3월 25일): 농민군, 고부군 백산(현 부안군 백산면)에 집결하여 백산창의대소를 발표,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지도부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봉기에 나섰다. * [[5월 3일]](3월 28일): 농민군이 태인 관아를 점거했다. * [[5월 6일]](4월 2일): 조정, 신임 전라 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장위영, 통위영, 서영의 병력으로 구성된 토벌군을 파견키로 했다. * [[5월 7일]](4월 3일): 진산(현 금산군 진산면)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유림 및 보부상으로 구성된 민보군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 [[5월 8일]](4월 4일) * 농민군이 부안 관아를 점거했다.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제물포를 출발했다. * [[5월 10일]](4월 6일) * 농민군, 황토현(현 정읍시 덕천면)에서 전라 감영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황토현 전투).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선발대가 군산에 도착했다. * [[5월 11일]](4월 7일) * 농민군이 정읍 관아를 점거했다.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선발대가 전주에 도착했다. * 전라도 동복(현 화순군 동복면)에서 동학도들이 관아를 습격했다. * [[5월 12일]](4월 8일) * 농민군이 고창 관아를 점거했다. * 경군 본대가 군산에 도착했다. * [[5월 13일]](4월 9일) * 농민군이 무장 관아를 점거했다. 이후 16일까지 농민군은 무장에 머물렀다. * 경군과 전라 감영군, 보부상대로 구성된 토벌대가 홍계훈의 인솔 하에 전주를 출발, 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 전라도 옥과(현 곡성군 옥과면)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본진과 합류하기 위해 정읍으로 향했다. * [[5월 14일]](4월 10일): 충청도 회덕(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충청 감영군에 진압되었다. * [[5월 16일]](4월 12일) * 농민군이 영광 관아를 점거했다. 이후 19일까지 농민군은 영광에 머물렀다. * 홍계훈, 병력 증원을 위해 전주로 돌아갔다. * 농민군 지도부, 대적시 약속 4항과 12조 계군호령을 제정, 반포하였다. * [[5월 18일]](4월 14일): 농민군, 법성 구수포에 정박 중인 한양호를 나포, 일본인 선장과 전운국 위원인 김용덕 등을 체포하고 돈을 빼앗은 다음 일본인 선장을 석방시켰다. * [[5월 19일]](4월 15일): 조정에서 제2차 고부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안핵사 이용태를 파직시켰다. * [[5월 20일]](4월 16일) * 농민군이 병력을 나누어 본대는 영광에 남고 별대는 함평으로 진군했다. 함평에서 수성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함평 관아를 점거했다. * 전봉준, 창의소 명의의 통문을 홍계훈 앞으로 보내 자신들이 봉기한 목적을 밝혔다. * [[5월 22일]](4월 18일) * 함평 주둔 농민군이 나주부의 공형(公兄)에게 봉기의 목적을 알리는 통문을 보냈다. * 조정에서 전라 감사 김문현을 경질하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후임 전라 감사로 임명하였다. * 조선 주재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 휴가차 본국에 일시 귀국한 오도리 가이스케를 대신하고 있었다.]가 조선이 청에 원병을 청할 가능성이 있음을 본국에 보고했다. * [[5월 23일]](4월 19일): 함평 주둔 농민군이 8개 조항의 폐정 개혁안을 홍계훈에게 전달했다. 이에 나주 목사 민종렬이 홍계훈을 대신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답변을 전달했다. * [[5월 25일]](4월 21일): 함평 주둔 농민군이 장성으로 이동하여 월평리(현 장성군 황룡면)에 진을 쳤다. * [[5월 26일]](4월 22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본진이 장성으로 이동했다. * [[5월 27일]](4월 23일): 농민군,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교전을 벌여 승리하였다(황룡촌 전투). 경군을 물리친 농민군은 방향을 돌려 전주성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 [[5월 29일]](4월 25일): 농민군이 정읍,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현 김제시 금산면)에 이르렀다. 원평에서 농민군은 고종의 윤음을 가지고 온 이효응, 배은환을 살해했다. * [[5월 31일]](4월 27일) * 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했다. * 일본 제국 [[중의원]]에서 대외 강경노선을 주장하는 여섯 정파의 연합인 경육파(硬六派)와 이에 동조한 다수의 자유당 의원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생애#s-8|내각]]의 행위에 관한 상주안(内閣の行為に関する上奏案)이 가결되었다. * [[6월 1일]](4월 28일)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완산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포위, 압박을 개시했다. * 농민군이 전주성 남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격퇴당하고 성 안으로 철수했다. * [[민영준]]이 조선 주제 청나라 공사인 [[원세개]]와 청군 출병 문제를 협의했다. * [[6월 2일]](4월 29일) * 농민군이 전주성 북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경군의 포격을 받고 성 안으로 철수했다. * 조정에서 시원임대신회의를 열고 청군 파병 요청을 논의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미 사전에 청군 차병(借兵)을 요청하는 외교 공문을 원세개를 통해 청나라에 전달해 놓고 있었다. * 일본 제국, 조선이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는 스기무라의 보고를 접수한 즉시 임시 각료 회의를 열고 중의원 해산 및 조선에 혼성 여단 파병을 결정하였다. * [[6월 4일]](5월 1일): 농민군이 전주성 남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성 안으로 철수하였다. * [[6월 5일]](5월 2일): 일본 제국, 대본영을 설치하고 [[히로시마]]에 주둔하고 있던 제5사단에 동원령을 내렸다. 일본군 선발대 500명이 오도리 가이스케 조선 주제 일본 공사와 함께 요코스카 항을 출항하였다. * [[6월 6일]](5월 3일): 농민군이 전주성 북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전봉준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 [[6월 7일]](5월 4일) * 농민군이 홍계훈에게 27개 조의 폐정 개혁안과 함께 귀순 의사를 밝히는 소지를 전달했다. * 조선 주재 일본 대리공사인 스기무라가 조선 측에 일본의 조선 출병을 통보했다. * [[6월 8일]](5월 5일) * 농민군 측의 제안에 홍계훈은 농민군이 자진하여 성문을 열고 신속히 해산하면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폐정 개혁안에 대해서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 * 일본 제국, 청나라에 조선 출병을 통보했다. * 청나라 섭사성이 지휘하는 청군 선발대가 충청도 아산만에 당도했다. * [[6월 11일]](5월 8일) * [[전주 화약]]이 체결되다. * 홍계훈, 농민군 측에 폐정 개혁안을 왕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였고, 농민군이 철수한 후 전주성을 접수한 홍계훈은 각 읍에 영을 내려 농민군이 귀환하는 대로 잡아들일 것을 명령했다. * [[6월 12일]](5월 9일) * 신임 전라 감사 김학진과 [[순변사]] 이원회가 전주에 도착했다. * 일본군 혼성 여단 선발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 [[6월 18일]](5월 15일) * 조선의 마지막 [[과거 제도|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이후 제1차 갑오개혁으로 인해 과거 시험은 폐지되었다. * [[7월 22일]]: [[프랑스]]에서 126km 거리의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가 개최되었다. *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 [[7월 25일]](6월 23일): [[청일전쟁]]의 시발점 풍도해전 발발. 단, 청일전쟁의 공식 선포는 8월 1일부터이다. [[1895년]] [[4월 17일]] 종전. * [[7월 27일]](6월 25일) * 제1차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 군국기무처 신설되다. * [[10월 20일]](9월 18일):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삼례에서 다시 뭉친 동학군은 일본의 국내 군대진입과 청일전쟁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봉기했으며 1차 봉기에 비해 반외세적 성격이 강했다. * [[11월 1일]]: 미국의 음악 잡지 [[빌보드]]가 창간되었다. * [[12월 10일]](11월 8일): 동학군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다. * [[12월 23일]](11월 21일): 제2차 [[갑오개혁]] 단행.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