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퐁디셰리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문서는 인도의 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때 퐁디셰리로 불렸던 인도의 연방 직할지, rd1=푸두체리)] [[영어]]: Pondicherry [[프랑스어]]: Pondichéry [[타밀어]]: புதுச்சேரி[Putuccēri, 푸두체리], பாண்டிச்சேரி[Pāṇṭiccēri, 판디체리] [목차] == 개요 == [[인도]] 동남부의 항구 도시. 퐁디체리, 폰디체리로도 불린다. 연방 직할령인 [[푸두체리]]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67만명이다. [[첸나이]]에서 남쪽으로 100km, [[마두라이]]에서 동북쪽으로 170km 떨어져 있다. 시가지는 강 하구의 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1674년에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의해 서구화되었고, 1954년에야 인도 정부에게 반환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어]]가 여전히 공용어고 프랑스 양식의 건축물이 많아 유럽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인류 공동체 마을인 [[오로빌]](Auroville)이 시내에서 북쪽 5km 지점에 있다. == 역사 == 본래 타밀 어로 판디체리로 불렸고, 로마 문헌에는 포두케 (Poduke) 혹은 포두크 (Poduc)로 기록되어 있다. 1674년에 프랑스가 상관을 차렸으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동맹 전쟁]] 중인 1693년에 [[네덜란드 제국]]에게 점령되었다가 1699년에 돌려받기도 하였다. [[7년 전쟁]] 중인 1761년에는 [[대영제국]]에게 점령되었다가 1763년의 [[파리 조약]]에서 돌려받았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푸두체리 지역만 유지하게 되었다) 1778년에 [[퐁디셰리 공방전]]에서 패하면서 또 영국 손에 넘어가고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향력을 잃는다. [[프랑스 혁명전쟁]] 중인 1793년에 영국은 다시 퐁디셰리를 점령하였고 1802년에야 아미앵 조약을 통해 돌려주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1803년에 재점령하였고 --도시의 수비력이 의심된다-- 1814년에야 돌려주었다. 다만 이후로는 간혹 일어난 인도 인들의 봉기를 제외하고는 1954년까지 별일 없었다. 이후 인도에 반환되었으나 지금도 구 프랑스령답게 프랑스 색이 짙으며 [[프랑스어]]가 쓰인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 중에서 프랑스 본토, 동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및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리셔스]] 및 이 외에도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퀘벡 주]] 등에 이주한 사람도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바카쉬 도라수로 이 사람은 [[북아프리카]] 출신 [[아랍인]]이나 흑인이 넘쳐흐르던 프랑스 축구 국대에서 유일한 인도계라 꽤 관심을 받기도 했다. [[분류:인도의 도시]][[분류:불인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