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만수전 (문서 편집) [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만수전'''}}}[br]{{{-1 昌德宮 萬壽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655년]] {{{-1 (창건)}}}[br][[1687년]] {{{-1 (소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만수전 일대.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만수전 터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대비전(大妃殿) 중 하나이다.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의 서북쪽에 있었다. 이름은 말 그대로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라는 뜻이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역사 == 1654년([[효종(조선)|효종]] 5년) [[창경궁 통명전]]에 살던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가 아프자 효종이 [[창덕궁 수정전|창덕궁 수정당]]을 확장, 증축하여 모셨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차도가 없자 불과 1년 뒤인 1655년(효종 6년) 효종은 수정당이 좁다는 이유로[[http://sillok.history.go.kr/id/kqa_10612004_004|#]] [[창덕궁 인정전|인정전]] 서북쪽 옛 흠경각(欽敬閣) 자리에 새로운 대비전 [[공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 이유로, 첫째, 거듭되는 [[공사]]로 백성들이 힘들어했고, 둘째, [[자연재해]]로 공사 중단이 잦았으며, 셋째, 대비전은 [[대전#s-4]]의 동쪽에 있는 것이 원칙이나 새 대비전은 서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경희궁|경덕궁]][* 현재의 [[경희궁]].]의 [[경희궁 승휘전|승휘전]], 어조당, 만상루 등을 옮겨 지으면서[* 즉,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다른 데서 옮겨오면 그 만큼 부담이 덜하지 않겠냐는 뜻.] 공사를 끝까지 밀어붙여 2년 뒤인 1657년(효종 8년) 완공시켰다. --공사를 안 하는 게 백성들에게는 최고입니다만-- 만수전 건립 후 자의대비는 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0804002_004|#]] 만수전의 규모는 굉장히 컸다. 도총부[* [[조선시대]], 중앙군인 오위를 지휘 감독하던 최고 군령 기관.]를 포함한 기존의 [[건물]]들을 없애고 [[궁궐]]의 서쪽 [[담|담장]]을 옮겼으며 본전과 별전 영역을 따로 두었다. 별전은 [[경덕궁]] 경화당을 옮겨 짓고 춘휘전(春暉殿)이라 했다. 1687년([[숙종(조선)|숙종]] 13년) 만수전은 [[화재]]로 불탔고 이후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만수전에 머물던 [[장렬왕후|자의대비]]는 [[창경궁 통명전]]으로 처소를 바꾸었고 1년 뒤에 [[죽음|세상을 떠났다.]][* 단, 사망한 장소는 [[창경궁]]의 내반원이다. 내반원은 [[내시]]들의 처소로 [[왕실]]의 최고어른이 그 곳에서 죽을 이유는 전혀 없다. 아마 근처를 지나다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듯 하다.] 별전 춘휘전은 한동안 비어 있다가 1695년(숙종 21년)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창덕궁 선원전|선원전]] [[건물]]으로 바뀌었으며 만수전 본전 일대에 [[경종(조선)|경종]]이 새로운 대비전인 [[창덕궁 경복전|경복전]]을 세웠다. 경복전마저 1824년(순조 24년)에 불탄 후 복구하지 않아 오늘날 이 곳은 빈 터로 남아있다. == 구조 == * 현재 전하는 [[기록]]과 [[그림]]이 많이 없지만, 1657년에 지은 《만수전수리도감의궤》를 보고 추정할 수 있다. 총 36칸으로 4면 가장자리에 [[마루|툇간]]을 두었으며 어칸은 3칸에 동익각은 9칸, 서익각은 5칸이라 적혀있다. 어칸의 [[천장]]엔 [[봉황]]을 그려넣었고 좌우 [[온돌|온돌방]]은 [[모란]]을 그린 목단반자로 꾸몄다고 한다. * 본전 영역에는 천경루(千慶樓), 헌선합(獻線閤)을 비롯하여 [[창고|곳간(庫間)]]과 세답방(洗踏房)[* [[빨래]]를 담당하던 곳.], 사약방(司鑰房)[* 이 [[사약]]을 만드는 곳이 아니고(...) [[열쇠]]와 [[자물쇠]]를 관리하던 정 6품 [[관리]]들이 머무르는 곳이다.]과 등촉방(燈燭房)[* 등불, 촛불을 관리하던 곳.]을 두었다. 또한 동익각 밖에 정홍교(井虹橋)란 [[교량|다리]]를 놓았으며 만수전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서행각과 [[나무]] [[판]]으로 만든 [[담|담장]]을 두었다. 그리고 바깥에 월랑을 설치하고 [[문|대문]]은 5채, 한 칸짜리 작은 문은 12채를 두었다. == 부속 건물 == === 춘휘전 === 역사는 [[창덕궁 선원전#s-2|창덕궁 선원전의 역사]] 항목으로. 《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 따르면 창덕궁으로 옮길 때의 모습은 총 20칸으로, 4면 가장자리에 툇간을 두었으며 [[건물]] 주위로 서행각과 서월랑, 북월랑을 지었고, 북월랑과 장유고 앞에는 [[나무]] [[판]]으로 만든 [[담|담장]]을 설치했다. 동변 화계[* 화계는 [[꽃]]이나 [[나무]]를 심기 위해 뜰 한쪽에 또는 뒷담 안에 계단식으로 만든 화단이다.]는 무려 6층으로 쌓아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게 했다. 만수전과 춘휘전 구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www.gogung.go.kr/image/upload_file/attcfiles/20120515/20120515_114007_18.pdf|이 곳]]을 참조. === 양지당 ===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선원전#s-4.3|양지당]] 항목으로.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장렬왕후, version=135, paragraph=2.3)] [[분류:창덕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