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현왕후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 ||<#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정현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성종의 계비[br]{{{+1 정현왕후 | 貞顯王后}}}'''}}}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f14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연산군 · 중종조 왕대비[br]{{{+1 자순왕대비 | 慈順王大妃}}}'''}}}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hanja.pe.kr/king9-3.jpg|width=100%]]}}} || ||<-2> {{{#ffd400 {{{-2 선릉 전경}}} }}} || ||<|2> '''출생''' ||[[1462년]] [[7월 30일]]^^([[음력]] [[6월 25일]])^^ || ||[[조선]] [[충청도]] [[청주시|청주목]] [[신창현]] 관아[br](現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 ||<|2> '''사망''' ||[[1530년]] [[9월 23일]]^^([[음력]] [[8월 22일]])^^[br]{{{-1 (향년 68세)}}}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경복궁 자선당|동궁]] 정침[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 || '''능묘''' ||[[선릉#s-3|선릉]](宣陵) ||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숙의}}}''' || ||[[1473년]] [[7월 17일]] ~ [[1480년]] [[12월 18일]] || ||'''{{{#ffd400 조선 왕비}}}''' || ||[[1480년]] [[12월 18일]] ~ [[1495년]] [[1월 30일]] || ||'''{{{#ffd400 조선 왕대비}}}''' || ||[[1495년]] [[2월 3일]] ~ [[1530년]] [[9월 2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파평 윤씨]] || || '''휘''' ||창년(昌年)[*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508023_002|《중종실록》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있을 때인 [[1522년|임오년]]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官衙)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 || '''부모''' ||부친 영원부원군 윤호 (鈴原府院君 尹壕, {{{-3 1424 ~ 1496}}}) 모친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3 1421 ~ 1500}}}) || ||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녀 || || '''배우자''' ||[[성종(조선)|성종]] || || '''자녀''' ||''' 1남 1녀 {{{#gray (1남 3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순숙공주]](順淑公主, {{{-3 1478 ~ 1488}}}) {{{#gray 차녀 - 공주(1485 ~ 1486) 요절}}} 장남 - '''[[중종(조선)|중종]]'''(中宗, {{{-3 1488 ~ 1544}}})[* 작호는 진성대군(晉城大君).] {{{#gray 3녀 - 공주(1490 ~ 1490) 요절}}} }}}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봉작''' ||숙의(淑儀) || || '''전호''' ||효경전(孝敬殿) || || '''존호''' ||'''자순'''화혜('''慈順'''和惠) || || '''휘호''' ||소의흠숙(昭懿欽淑) || || '''시호''' ||'''정현왕후(貞顯王后)'''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조선)|성종]]의 3번째 [[왕비]]이자 계비로서,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조선)|중종]]의 모후이다. 또한 [[조선/역대 왕비|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 운이 좋게 [[후궁]] 출신으로 [[왕비|중전]]이 되었다가[* [[조선/역대 왕비|조선의 역대 왕비]] 중 [[후궁]] 출신 [[왕비]]는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세자빈]]이 된 후에 사망해서 이후 [[왕비]]로 추존된 [[문종(조선)|문종]]비 [[현덕왕후]],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즉위 후 왕비가 된 [[예종(조선)|예종]]비 [[안순왕후]], [[자을산군|성종]]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진성대군|중종]]비 [[장경왕후]], [[숙종(조선)|숙종]]비 [[희빈 장씨]]가 있다.] 왕대비가 된 유이한 인물이다.[* 나머지 1명은 [[예종(조선)|예종]]의 세자 시절 후궁이었다가 왕비, 왕대비까지 오른 안순왕후 한씨. 다만 [[안순왕후]]는 부군 [[예종(조선)|예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왕대비가 된 후 사망할 때까지 [[정희왕후|시어머니]]와 [[인수대비|형님]]에게 서열이 밀렸고, 아들 [[제안대군]]은 어렸던 바람에 시조카 성종에게 왕위가 옮겨간 반면, 정현왕후는 성종의 왕비들 중 가장 마지막에 [[왕비]]가 되었지만 15년 동안 왕비 자리에 있었다. ([[공혜왕후]]는 4년, 폐비 윤씨는 3년간 왕비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으로 친아들이 왕이 되었을뿐더러 [[연산군]] 재위 후반~중종 시절까지 왕실의 가장 큰어른이었다.] == 생애 == === 숙의 시절 === 영원부원군 윤호와 부부인 [[담양 전씨|전씨]]의 딸로 태어났다. 윤호는 좌명공신 윤곤의 손자로, 윤곤은 [[한명회]]에게 고모부가 되고, [[정희왕후]]의 5촌 당숙이다.[* 즉, 윤호는 [[정희왕후]]의 7촌 조카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간택[[후궁]]으로 뽑혀 입궁했다. 그러나 [[폐비 윤씨|중전 윤씨]]가 폐서인된 후 [[1480년]](성종 11년),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 [[자을산군|성종]]의 많은 [[후궁]]들 중에서 정현왕후만한 명문가 출신이 없었고, 당시엔 딸 하나를 낳아 생산능력도 입증했으며 [[진성대군|중종]]은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진성대군|중종]]을 빨리 낳았다면 서자가 적자로 바뀌는 상황이라 질서가 깨졌으므로 [[왕비]]가 못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숙종(조선)|숙종]] 때에는 [[후궁]] 시절 먼저 [[경종(조선)|경아들]]을 낳고 뒤에 왕비에 오른 [[희빈 장씨]]가 있지만 희빈 장씨 소생 [[경종(조선)|왕자]] 외에는 아들이 없었고 이미 원자로 책봉되어 차기 [[조선/왕사|왕위계승자]]가 되었기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로 인해 [[경종(조선)|경종]]이 적자냐 서자냐를 두고 정통성이 애매해져서 복잡해질 뻔 했으나, [[희빈 장씨]]가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뒤 [[후궁]] 신분으로 죽으면서 추후 [[경종(조선)|경종]]은 [[노론]]계 신하들에 의해 서자로 기록된다.] 새 왕비 후보로 1순위나 다름없었다. [[왕비]]로 책봉됐을 당시 정현왕후의 나이는 19살이었다. === [[왕비]] 시절 === [[성종(조선)|성종]]의 [[왕비|계비]]가 되어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을 친아들 보는 것처럼 친히 돌보았다. [[성종실록|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조선/왕사|왕]]이 된 후에야 [[피 묻은 적삼]]을 통해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임을 알았다고 한다. [[1488년]](성종 19년), [[중종(조선)|진성대군]]을 낳았다. === [[왕대비]] 시절 === [[연산군]]이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당시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정현왕후의 침전 앞까지 직접 쳐들어와 침전 밖으로 나오라고 칼을 들고 소리를 질러댔다. 정현왕후는 두려워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 [[연산군]]이 의붓어머니 정현왕후를 폐비 사건의 동조자라고 생각해서 저런 행동을 한 것이라면 오해가 된다. 정현왕후가 [[후궁]]인 숙의였을 당시 [[폐비 윤씨]]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시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임을 제외하면 자녀로는 딸 [[순숙공주]]밖에 없었고, 또한 [[폐비 윤씨]]가 [[폐서인|폐출]]될 당시 18살, [[왕비]]로 책봉될 당시 19살, [[폐비 윤씨|폐비]]가 [[사사]]될 당시 21살이었는데 영향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아니면 그냥 [[왕비|어머니]]의 자리를 대체한 사람에 대한 화풀이였을 수도 있다. 이때 말고는 [[연산군]]이 자순대비를 해하려 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원래 계획한 일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이 날 연산군은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동이 오락가락한다. 예를 들어 이세좌와 그 친인척들에 관련해서도 유배를 명령했다가 갑자기 도로 불러들여 장을 쳐서 다시 유배보내게 하는 등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인다. 다행히 [[폐비 신씨|중전 신씨]]가 뒤쫓아 나와 간곡히 말려서 [[연산군]]이 물러났다. 사실 이날 말고는 [[연산군]]은 자순대비에게 잘해 주었다. [[갑자사화]] 이전에도 자순대비의 부탁을 받아 [[한성부|한양]]내에 있는 [[봉은사]]에 전답을 시주하였고,[* 연산 7년([[1501년|1501]]) [[3월 17일]].] 자순대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했다.[* 연산 9년([[1503년|1503]]) [[7월 14일]].] [[갑자사화]] 이후로는 오히려 더 잘해준 편인데 대비전에 많은 예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번 실려 있으며 '자순 화혜 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렸다.[* 연산 11년([[1505년|1505]]) [[8월 26일]].] [[1505년]](연산군 11년), [[5월 5일]] 자순대비전에 올린 잔칫상은 [[밀가루]]가 40여 석이나 들었고 채화를 꽂고 금은으로 꾸며서 정교함과 화려함을 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아들 [[중종(조선)|진성대군]]이 [[조선/왕사|왕위]]에 옹립되자 '''"[[진성대군]]이 아직 어려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찌 [[조선|나라]]를 이끌 수 있겠소"'''라며 --체면상-- 한 번 튕겼다가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 내 따르리다.[* [[여인천하]]에서 이 대사가 그대로 나왔다. 다만 여기서는 진심으로 [[연산군]]의 폐위를 슬퍼하였다.]" 하며 마지못해 승인하는 듯 어보(御寶)를 찍었다. [[중종(조선)|새 임금]]이 [[조선/왕사|왕위]]에 올랐지만 [[대왕대비]]로 승격되지 않고 그대로 [[왕대비]]였다. 정현왕후가 [[진성대군|중종]]의 [[인수대비|할머니]]가 아닌 [[정현왕후|어머니]]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연산군의 비였던 [[폐비 신씨|신씨]]도 [[폐위]]되어 [[왕대비]] 자리에 새로 오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며느리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조선)|명종]]이 [[조선/왕사|보위]]에 올랐을 때 [[인종(조선)|인종]]의 비인 [[인성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문정왕후]]는 [[명종(조선)|명종]]의 모후임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로 승격되었다. [[중종(조선)|중종]] 시절에는 [[왕비|왕후]]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문정왕후]]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내명부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큰어른이었고, [[연산군]] 시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연산군일기]]를 보면 생일마다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의 모습인데, [[중종실록]]을 보면 [[승정원]]에서 알아서 정현왕후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고 정치적 조언을 듣는 상황이 자주 언급된다. 심지어 본인이 죽었을 때 아들 [[중종(조선)|중종]]과 손자 [[인종(조선)|인종]]은 기력이 약하니 무조건 [[유교]]식 FM대로 하지 말고 상황 봐서 적당히 조절하라고[[http://sillok.history.go.kr/id/kka_11712015_006|#]] 미리 조언을 주기도 했다.[* [[태종(조선)|태종]]이 [[세종대왕]]보고 본인 상중에는 [[고기]](육류)를 먹으라고 조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 참고로 이건 별세하기 8년 전 이야기. [[승하]] 10년 전부터 지병인 [[천식]]과 담질환([[심장]]질환)으로 오랫동안 시달렸다. [[1527년]](중종 22년), [[작서의 변]] 때는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의 첫째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의 [[노비|여종]]들을 조사해서 일부를 내쫓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왕세자|세자]]였던 [[인종(조선)|인종]]을 [[저주]]한 범인으로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가 유력한 용의자이니 조사해야 한다"는 요지로 글을 써서 아들 [[중종(조선)|중종]]에게 보낸 적이 있다. [[1530년]](중종 25년), 69세 나이에 천식과 노환으로 [[경복궁]] [[경복궁 자선당|동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 기타 == * 사후 남편 [[성종(조선)|성종]]이 묻혀 있는 '''[[선릉]](宣陵)'''에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묻혔다. 그런데 지금 정현왕후의 시신은 선릉에 없다. [[임진왜란]] 당시 [[선정릉]]이 모두 파헤쳐졌는데, [[성종(조선)|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잿더미만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 [[선정릉]]에는 새로 지어올린 의복만 묻혔다. * 정현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인 윤삼산(尹三山)은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6촌 관계이며, 성종과 정현왕후는 윤척(尹陟)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지간이다. == 가계 == * 친정([[파평 윤씨]]) * 아버지 :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 * 어머니 :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전씨]](延安府夫人 田氏) * 오빠 : 윤은로(尹殷老) * 동생 : 윤탕로(尹湯老)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세조(조선)|세조]](世祖, 1417년 11월 2일 - 1468년 9월 23일) * 시조모 : [[정희왕후]] [[파평 윤씨|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년 12월 8일 - 1483년 5월 6일) * 시아버지 : [[의경세자|덕종]](德宗, 1438년 10월 3일 - 1457년 9월 20일) * '''시어머니 : [[인수대비|소혜왕후]] [[청주 한씨|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 10월 7일 - 1504년 5월 11일)''' * '''배우자 / 슬하 자녀''' * '''남편 : [[성종(조선)|성종]](成宗 / 1457년 8월 19일 - 1495년 1월 20일, 재위 1469년 ~ 1495년)''' * 첫째 : [[순숙공주]](順淑公主, 1478년 혹은 1479년 - 1488년 7월 14일) * 둘째 : 공주(公主, 1485년 11윌 - 1486년 2월 13일 )[* '''을사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 * '''셋째 : [[중종(조선)|중종]](中宗 / 1488년 3월 5일 - 1544년 11월 15일, 재위 1506년 ~ 1544년)''' * 넷째 : 공주(公主, 1490년 11월 - ? )[* [[1490년|을사년]] 11월에 [[미숙아|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조선/왕실|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 《성종대왕묘지문》에서 정현왕후의 소생으로는 아들 중종만 언급되는 걸 보면, [[1494년]](성종 25년) 12월 이전에는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대중매체에서 == 정현왕후가 살아온 시대는 [[조선 왕실]]사의 격동기였다. 시어머니가 [[인수대비]], 의붓아들이 [[연산군]], 며느리가 [[문정왕후]]니 말 다했다. 그래서 주연으로는 안 나오더라도 조연으로는 꾸준히 나온다. 대체로 온화한 성품이라 [[폐비 윤씨]]나 [[인수대비]], [[문정왕후]] 같은 강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에 비해 병풍이 되기 쉬워 보이지만, 어린 [[연산군]]에게 생모가 [[폐비 윤씨]]인 걸 숨기고 정현왕후가 어머니인 거로 한다거나, [[중종반정]]을 추인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조용하게라도 존재감은 드러낸다. [[연산군]]과의 관계는 정현왕후의 성품을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연산군을 아끼는 모습으로 나온다. 특이한 점은, [[사극]]에서는 한번도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이 같이 나온 적이 없단 거다. [[연산군]]대와 [[중종(조선)|중종]]대가 분위기상 하도 따로 노는 시대라, 정현왕후의 삶은 항상 반토막으로 나온다. [[성종(조선)|성종]]~[[연산군|연산]]대 사극을 보다가 [[중종(조선)|중종]]대 사극을 보면 '''"저 사람이 저 사람이야?"'''라고 생각될 정도. 앞서 말했듯이 젊은 시절에는 [[후궁]]이었고 노년 시절에는 왕대비였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가 더욱 어렵다. 실제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일기]]에서 기록된 정현왕후는 [[조선/왕실|왕실]]에서 [[연산군]]의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에 가까운데, [[중종반정]] 이후에는 [[중종(조선)|중종]]도 갈팡질팡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 대신들이 조언을 받으러 대비전을 가끔 찾아오는 기록이 종종 있다. 왕대비 시절을 묘사하는 대중매체에서는 보통 정현왕후보다는 [[자순대비]]의 호칭으로 등장한다. || [[파일:설중매 정현왕후.png|width=100%]] || [[파일:풍란 정현왕후.png|width=100%]] || || 《설중매》의 정현왕후 || 《풍란》의 정현왕후 ||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의 3탄 《설중매》와 4탄 《풍란》에서는 배우 [[최명길(배우)|최명길]][* 이 때 며느리 [[문정왕후]]는 배우 [[김혜자]]가 연기했는데 최명길(1962년생)이 김혜자(1941년생)의 딸뻘인데도 시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최명길과 김혜자 둘 다 원로배우이지만 당시에는 최명길이 김혜자와 달리 20대 젊은 여배우라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캐스팅이었다.]이 연기했다. 《설중매》에서는 숙의 시절부터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사망(왕대비 시절)까지 나오는데 조용하고 현숙한 이미지로 묘사되었으며 [[연산군]]([[임영규]])이 [[갑자사화]]를 거쳐 [[흑화]]한 이후로는 연산군을 걱정하면서도 굉장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1985년 방영한 《풍란》에서는 [[중종반정]] 이후의 정현왕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왕실]] 최고 어른으로 이따금 중종([[최상훈]]) 내외에게 문안을 받는 장면으로 간간히 등장하나 일찍 [[장경왕후|친어머니]]를 잃은 [[인종(조선)|세자]]의 배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김안로]](김길호)에게 작은 힘이나마 실어주는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비록 두 작품에 걸쳤지만 [[역사]]상 정현왕후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배우가 연기한 유일한 케이스. 그래서 앞서 말한 [[이미지]] 갭이 좀 떨어진다. 최명길이 20대 시절에 맡은 배역이다 보니, 《풍란》에 나오는 늙은 정현왕후를 기준으로 해도 최명길이 한참 후에 맡은 《[[용의 눈물]]》과 《[[대왕 세종]]》의 [[원경왕후]] 및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의 중년 [[명성황후]] 그리고 《[[근초고왕(드라마)|근초고왕]]》의 해비 해소술에 비하면 나이들었다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 1988년 개봉한 영화 《[[연산일기]]》에서는 배우 [[반효정]]이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배우 [[조민희]]가 연기했다.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드라마)|장녹수]]》에서는 배우 박영귀가 연기했다. ||[[파일:조광조 자순대비.png|width=100%]] || || 《조광조》의 정현왕후 || *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드라마)|조광조]]》에서는 배우 [[김자옥]]이 연기했다. 드라마 줄거리가 [[중종반정]]부터 시작하기에 자순대비로 출연한다. ||[[파일:external/www.oocities.org/kq22.jpg|width=100%]]|| || 《왕과 비》의 정현왕후 ||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윤지숙이 연기했다. 숙의 시절부터 등장. [[연산군]]([[안재모]])을 많이 위해주고 [[중종반정]] 후에도 연산군을 폐주가 아닌 선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산군이 자신의 친아들 [[중종(조선)|진성대군]]을 화풀이 삼아 여러모로 내리갈굼을 많이 하자 불똥이 튀길까 두려워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파일:external/img.sbs.co.kr/2007_02_08_13_14_02_171.jpg|width=100%]] || || 《[[여인천하]]》의 정현왕후 ||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이보희(배우)|이보희]]가 연기했다. 기존 사극에서의 정현왕후는 착하고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였으나 자애롭고도 강단있는 인물로 나온다.[* 이미지가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이전 사극에서는 죄다 [[후궁]]~[[왕비]] 시절이었지만 <여인천하>에서는 왕대비 시절이기 때문. 그래서 여기서는 자순대비라는 칭호로만 나온다.] 천하의 [[문정왕후]]([[전인화]])도 극 초반부에는 시어머니 정현왕후에게 크게 혼이 나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문정왕후를 많이 도와준다. 극 초반에는 문정왕후와 대립하는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도지원]])를 총애하나 경빈이 아들인 [[복성군]](안홍진)에게 건네준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경빈이 복성군에게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며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라고 준 것이었다. 문제는 [[갑자사화]]의 발단이 바로 성종 시절 [[폐비 윤씨]]의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인데다 당시의 피해자 중에 정현왕후도 있다는 것.] 과거 갑자사화에 [[트라우마]]가 있는 정현왕후는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 경빈의 적으로 돌변한다.[* 실제로 [[작서의 변]] 때 아예 대놓고 [[용의자]] 1순위를 경빈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 경빈의 적이 됨은 정현왕후 역시 후궁 출신으로 내명부의 암투가 왕실과 조정에 얼마나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너무도 똑똑히 봤고 기억하기 때문. 이후 경빈이 사사당할 때 가장 앞장서서 [[중종(조선)|중종]]([[최종환(배우)|최종환]])에게 경빈의 사사를 주장했으며 중종이 극구 거부하자[* 해설에 따르면 실제 역사에서 무려 19차례나 경빈의 사사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몸져 누워 얼마 안가 사망한다. 같은 시기 경빈도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어찌보면 동귀어진. || [[파일:DJG_E20180812_033128.160.jpg|width=100%]] || [[파일:DJG_E20180812_054236.426.jpg|width=100%]] || || 대비 (극 초반) || 대비 (극 후반) || *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배우 [[엄유신]][* 아들 중종역할 맡은 임호와 전원일기에서 남매로 출연했다. 단, 엄유신은 김회장의 큰 딸로 나왔지만, 임호는 김회장의 업둥이로 나왔다.]이 연기했다. [[중종(조선)|중종]]([[임호]])의 치세에만 나오기 때문에 《[[여인천하]]》와 마찬가지로 자순대비의 [[신분]]으로 나온다. 스토리상으로는 [[악역이 아닌 반동인물|의도치 않게 악역을 도와주어 장금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인물]]. 본인은 올곧고 흠잡을데 없는 성품이나 가까이 두고 있는 대신이나 상궁들이 오겸호([[조경환]])나 최 상궁([[견미리]]), 전 제조상궁 박 상궁([[박정수(배우)|박정수]]) 같은 사람들인지라 은연 중에 장금([[이영애]])과 한 상궁([[양미경]])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금이 [[궁녀]]가 되기 위한 [[시험]]에서 진가루([[밀가루]])를 잃어버려[* [[명나라]] 사신에게 겁탈당한 노 상궁 수하의 나인이 낳은 어린 [[궁녀]](그녀의 생모였던 나인은 결국 궁녀의 법도에 따라 노 상궁이 직접 자진하게끔 하였고 그 어린 궁녀는 노 상궁이 어미라고 생각하게 하고 [[궁]]에서 키우게 한 것)가 노 상궁이 연로하여 궁을 떠나게 되자 마지막으로 만둣국을 올리고 싶어서 장금의 진가루를 훔친 것. 장금은 이 사연을 알고 차마 진가루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숭([[배추]])으로 [[만두]]를 만드는데 상궁들은 장금이 정해진 재료로 만두를 만들지 않았다며 탈락시키지만 숭채만두를 본 정현왕후가 장금을 선발하라고 명한다. 이후 최고상궁 경합 1차전에서 장금이 [[꼼수]]를 쓴 탓에 한 상궁이 패배하자 한 상궁을 좋지 않게 보았지만 명나라 사신 접대 사건을 문정왕후(박정숙 분)에게서 전해듣자 제조상궁과 최 상궁을 꾸짖고 2차전은 한 상궁이 이겼다고 선포한다. 3차전에서는 중종의 뜻을 따라 엉겁결에 한 상궁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이후 최 상궁 등이 반발하자 후회하는 모습을 내비쳤고 결국 문정왕후에게 내명부 권한을 위임한다. 장금이 [[의녀]]가 되었을 무렵 이러저러한 일로 중종과 대립하면서[* 배후에는 중종의 정치 [[개혁]]에 반발하는 오겸호 일파의 농간이 있었다.] 치료를 거부하다가 장금이 나서서 [[수수께끼]]를 빙자한 설득으로 치료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앞서 치료를 거부한 탓에 [[몸]]이 허약해져서 탕약을 마실 수 없었고 그런 정현왕후에게 장금은 자순대비가 싫어하는 [[마늘]]로 만든 환을 올린다. 뒤에 열이([[이세은]])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윗전에 알렸으나 이미 환약으로 병세에 차도가 생겼던 시점이라 크게 화를 내지는 않고 장금에게 어떻게 마늘 [[맛]]을 감췄는지를 물은 뒤 편식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후 오겸호, 최 상궁 일파의 악행이 밝혀지면서 이들과 학을 떼지만 중종이 장금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자 당시 [[임신]] 중이었던 연생([[박은혜]])이 장금과 중종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이유로 꾸짖어서 조산 + 생명의 위기를 겪게 하였고 급기야는 [[석고대죄]]를 시전하여 결국 중종이 명령을 철회하게 한다. 그 이후로도 중종이 장금에게 종종 [[심리]] 상담을 받자 그 뜻을 오해한 자순대비는 "그럴 것이라면 장금을 [[후궁]]으로 삼으라"고 중종과 문정왕후를 압박한다. || [[파일:external/opds.joins.com/htm_200803171156330201000002010700108-001.jpg|width=100%]] || ||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의 정현왕후 ||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는 배우 [[이진]][* 이진은 이 드라마에서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 [[정태우]]와는 <[[논스톱3]]>에서 커플로 나왔다.]이 연기했다. '윤숙현'이라는 가상의 이름[* 폐비 윤씨는 '윤소화'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했다.]으로 숙의 시절부터 [[중종반정]] 전까지 나온다. 매우 선량하며 친아들이 아닌 [[연산군]]에게도 따뜻하게 대한다.[* 그래서 연산군도 정현왕후에게 대들 때 "왜 나를 박대하느냐"라고 화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비록 아껴주기는 했지만 내가 잘못할 때 회초리를 때리고 꾸짖어 주었으면 했다."는 식으로 섭섭해한다.] 숙의 시절부터 자신의 윗전인 [[폐비 윤씨]]를 누구보다도 공경하였으며 다른 [[후궁]]들이 폐비 윤씨의 폐위를 간청할 때 혼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폐비 윤씨를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성종(조선)|성종]]의 후궁들 중 가장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불이익을 감수하는 태도를 보인 덕분에 결과적으로 윗전 대비들로부터 새 [[중전]]으로 낙점된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는 배우 [[한보배]](숙의~중전)와 배우 [[고정민(배우)|고정민]](왕대비)이 연기했다. [[주인공]] 인수대비([[채시라]])에 치우쳐서 분량은 적다. ||[[파일:역적 정현왕후.png|width=100%]] || || 《역적》의 정현왕후 ||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김경화]][* MBC [[아나운서]] 출신.]가 연기했다. ||[[파일:7일의 왕비 자순대비.png|width=100%]] || || 《7일의 왕비》의 정현왕후 ||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도지원]][*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현왕후의 며느리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 역.]이 연기했다. 주인공인 7일의 왕비 [[단경왕후]]를 며느리로 둔 역할이기 때문에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분량이 많다. 보통 연산군을 아끼고 사랑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부분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연산군([[이동건]])과 약간의 애증 관계라고 나온다. == 참고 문서 == * [[갑자사화]] *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 * [[문정왕후]] * [[복성군]] * [[성종(조선)|성종]] * [[성종실록]] * [[연산군]] * [[연산군일기]] * [[소혜왕후|인수대비]] * [[작서의 변]] * [[정희왕후]] * [[중종(조선)|중종]] * [[중종실록]] * [[폐비 윤씨]] [[분류:조선의 왕비]][[분류:파평 윤씨]][[분류:1462년 출생]][[분류:1530년 사망]][[분류:아산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