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덕진 (문서 편집)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덕진}}}'''[br]'''丁德鎭'''}}}}}} || || '''이명''' ||정팔진(丁八鎭) || || '''자 / 호''' ||기숙(基淑) / 기수(己修) || || '''본관''' ||[[나주 정씨(丁)|나주 정씨]](羅州 丁氏)[* 초암공파(草菴公派)-감찰공계(監察公系) 28세 진(鎭) 항렬.] || ||<|2> '''출생''' ||[[1897년]] [[1월 9일]]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달서구|달서면]] [[성당동]][br](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183번지[* 현재는 사라진 지번으로, [[대구문화예술회관]] 입구 오른쪽 주차장 일부로 추정된다.]) || ||<|2> '''사망''' ||[[1977년]] [[4월 24일]] (향년 80세)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 || '''종교''' ||[[기독교]][* [[http://db.history.go.kr/id/ij_091_0010_00040|독립신문 상해판 제23호 (1923. 2. 17)]]]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20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97년 1월 9일 경상북도 대구군 달서면 성당동(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183번지)에서 아버지 정규오(丁奎五, 1864. 4. 19 ~ 1932. 6. 16)[* 자는 진오(晉五).]와 어머니 [[성주 이씨]](1861. 2. 8 ~ 1938. 1. 26)[* 이중립(李仲立)의 딸이다.]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 8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이현수(李賢壽)[*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099|정덕진 독립유공자 공적개요]]에는 이귀수(李貴壽)로 적혀 있다.]를 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포고문·경고문·긴급경고문·자유신보(自由新報)·물품불구매(不購買)고지서·납세거절 협박문·유고문(諭告文)·군사주비단 단칙(軍事籌備團團則)·임시교통사무국 장정(章程)·의용단(義勇團) 취지서·독립공채(獨立公債) 모집에 관한 인정서(認定書)·독립공채 모집 임명장·독립공채 증권(證券)을 작성 후 인쇄하였다. 그리고 인쇄된 문서를 경상북도 관내 [[조선인]] 군수·면장 등 관리들과 지역 부호들에게 발송했고, 늦은 밤에는 이 문서들을 대구부 관내 길거리 곳곳에 뿌려놓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또한 이현수·[[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93|서장환]](徐章煥)·[[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42|곽종해]](郭鍾海) 등과 함께 1923년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했고, 이에 경상북도 대구부·[[평안남도]] [[평양부]]·[[전라북도]] [[전주군]] 등지에 거주하는 외국인 선교사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이어 워싱턴군축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신문사와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1월 [[일본 제국 경찰]]의 갑작스런 가택수색을 당한 뒤 앞서 언급한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13종의 문서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던 문서 등이 압수되었고, 동지 20여 명과 함께 경상북도경찰부에 [[http://db.history.go.kr/id/su_007_1923_01_99_1020|검거되었다]]. 그런데 당초 1923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0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244&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2355&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출옥했으나]] 다시 체포돼 1923년 3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977년 4월 24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별세했다. 1977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10년 11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달서구 출신 인물]][[분류:나주 정씨(丁)]][[분류:1897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