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문서 편집) [[분류:1857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시비우 주 출신 인물]][[분류:오스트리아의 인물]][[분류: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군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include(틀:1차세계대전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급 장교)] |||| '''{{{#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9대 장군참모장[br]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상급대장[br]{{{+1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br]Arthur Arz von Straußenburg}}}'''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rz_Arthur_von_Straussenburg_1.jpg|width=100%]]}}} || || 이름 ||'''Arthur Albert Arz von Straußenburg'''[br]아르투어 알베르트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슈트라우센부르크'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 || 출생 ||[[1857년]] [[6월 16일]][br][[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height=15]] [[오스트리아 제국]][br]{{{-2 [[파일:트란실바니아 대공국 국기.svg|height=12]]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시비우|헤르만슈타트]]}}} || || 사망 ||[[1935년]] [[7월 1일]](향년 78세)[br][[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height=15]]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헝가리 왕국]][br]{{{-2 [[파일:부다페스트의 기(1703(?)-1873).svg|height=12]] [[부다페스트]]}}} || || 최종 계급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상급대장 계급장.svg|width=35px]] [[육군]] [[상급대장|상급대장]][br]{{{-2 (Generaloberst)}}} ||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장군참모장이기도 했다. == 생애 == 아르츠는 1857년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의 헤르만슈타트에서 [[개신교]]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카를 구스타프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Karl Gustav Arz von Straußenburg)는 헤르만슈타트의 [[우체국]] 국장이자 헝가리 의회의 [[양원제|상원]]으로 상당한 거물이였다. 조상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으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인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아르츠는 처음 몇 주 동안에는 수도의 황립 및 왕립 전쟁성의 부서장으로 남아있었으나 제15보병사단으로 배치된 후 [[동부전선]]에 참전하였다. 이후 [[동부전선]] 및 루마니아 전선에서 성과를 내며 [[카를 1세|카를 대공]]의 신임을 받았다. 카를 대공은 황제가 된 후 사사건건 자기와 마찰을 일으켰던 콘라트 장군참모장을 해임하고 아르츠를 선임하였는데, 자신감 있고 야심 찬 콘라트와는 다르게 아르츠는 순종적인 성격으로 카를 1세의 충실한 군인이였다. 그러나 제국은 패배하였고 제국군은 해체되었다. 제국이 공중분해된 후 아르츠는 헝가리의 시민이 되었으나, 그의 고향은 루마니아 땅이 되었고 루마니아는 아르츠에 입국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르츠는 죽을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도 연금 지급을 거부당한 아르츠는 군인 연금만으로 살아야 했기에 가난한 삶은 살아야했다. 설상가상으로 너무 일찍 이탈리아 전선에 휴전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많은 오스트리아 군인이 이탈리아 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는 비난을 받아 재판까지 갔었는데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년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회고록을 쓰며 살다가 연금을 받기위해 [[부다페스트]]에 머물던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