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능안골 고분군 (문서 편집)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420호}}}''' || || {{{+1 {{{#fff '''부여 능안골 고분군'''}}}}}} {{{-1 {{{#fff 扶餘 陵안골 古墳群}}}}}} {{{-1 {{{#fff Ancient Tombs in Neungangol, Buyeo}}}}}}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번지 외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 '''{{{#fff 면적}}}''' || 164,701㎡ || || '''{{{#fff 지정연도}}}''' || 2000년 7월 22일 || || '''{{{#fff 제작시기}}}''' || 백제시대(6C ~ 7C)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부여 능안골 고분군, 너비=36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부여_능안골_고분군_전경-1.jpg|width=100%]]}}} || || {{{#fbe673 ''' 능안골 고분군의 전경 '''}}} || [목차] [clearfix] == 개요 ==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귀족|귀족층]]의 무덤군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20호로 지정되어있다. == 위치 == [[부여씨|백제의 왕족]]들이 묻혀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다. [[능산리 고분군]](왕족) - 능안골 고분군(고위 귀족) > 염창리 고분군(하위 귀족) 순으로 위계에 따라 동쪽으로 순차적이게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월명산 남쪽 능선 끝자락 부분의 작은 언덕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4번국도]]([[대백제로]]) 바로 옆에 위치해있고 지대도 낮아서 방문 시 접근성은 좋은 편이다. == 특징 == '''대표적인 백제 사비시대 귀족층의 무덤군'''이다. 규모가 큰 사비시대 귀족의 합장묘가 다수 발견되었다. 보통 백제의 고분들은 [[도굴]]당하기 쉬운데 능안골 고분군은 워낙 철저하게 잊혀진 유적이라 그런지 도굴 피해가 현저히 적어서 처녀분[*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역사 ==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 이 곳은 백제 고위 귀족층의 집단 매장지로 사용되었다가 [[백제멸망전]] 때 백제의 상류층 상당수가 당으로 압송되면서 사람들의 기억속에선 점차 잊혀진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유적이 위치한 장소는 현지 주민들에게 '능안골(陵안골)'이라 불리며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지명에 남아 후대까지 전해졌다. 이후 1994년 [[부여군]] 공설운동장 조성 과정 중 백제시대의 고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1995년과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후 백제 후기 [[귀족]]들의 집단 묘역이라는 점과 출토유물들이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7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깔끔하게 묘역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주차장과 화장실 및 탐방로 등이 설치된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 조사내용 및 주요고분 == [[파일:고분군전경.jpg]] 발굴 당시 고분군의 모습 2차례에 걸친 [[발굴|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그동안 조사단은 총 5,000평에 대해 정밀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굴식 돌방무덤 30여기, 돌덧널무덤 20여기, 독무덤 4기 등 모두 58기의 백제고분과 세가지 유형의 묘제가 확인되었다.[* 참고로 여말선초의 토광묘도 2기 확인되었다.] 대부분 땅 속 깊이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것이 특징이다. === 36호분 === 대표적인 사비시대 귀족의 부부 합장묘이다. === 45호분 === 고분군 남쪽의 만들어진 무덤인데 경사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작은 돌들로 3단 축대를 만들어 묘역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 58호분 === 무덤 남쪽을 별도로 좁게 파고 내려간 뒤, 바닥에 작은 돌들을 덮은 배수로를 L자형으로 약 11m 길이가 되게 조성하였다. 다른 고분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독특한 구조라고 한다. == 출토유물 == [[파일:44호분(출토은제관식및요대장식일괄) (1).jpg]] 은제관식 및 요대장식 일괄(44호분) [[파일:32호분(출토금제이식).jpg]] 금제귀걸이(32호분) [[파일:AKR20180312047300005_02_i_P2.jpg]] [[은제관모장식(백제)|은제관모장식]](36호분) == 의의 == 수많은 고분들과 그 속에서 나온 부장품들은 백제 사비시기 고위 [[귀족|귀족층]]의 다양한 무덤형식 연구와 당대의 의복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되어주었다. 또한 무덤을 파묘[* 옮기거나 고쳐묻기 위해 무덤을 파내는 행위.] 혹은 [[이장]]하는 등의 행위를 한 무덤터도 여럿 발견되어 기록 부족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백제의 [[장례|장례문화]]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이장을 위해 무덤에서 석재를 전부 꺼내고 흙으로 메웠다고 한다.] == 여담 == 백제세계유산센터[* [[문화재청]] 산하의 재단법인.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통합관리기구 역할을 맡고 있다.] 에 의해 [[백제역사유적지구]] 확장 등재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차후 세계문화유산으로 편입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http://www.jjan.kr/1115276|#]] == 외부 링크 ==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7485&cid=40942&categoryId=33375|두산백과: 부여 능안골 고분군]]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4395|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능안골고분군]] * [[https://ko.m.wikipedia.org/wiki/%EB%B6%80%EC%97%AC_%EB%8A%A5%EC%95%88%EA%B3%A8_%EA%B3%A0%EB%B6%84%EA%B5%B0|위키백과: 부여 능안골 고분군]] == 사적 제420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4200000,34&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부여 능안골 고분군 (扶餘 陵안골 古墳群)]] >부여 능산리고분군 동쪽에 있는 백제의 무덤이다. >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紬)·사(紗)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분류:고분]][[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충청남도의 무덤]][[분류:백제]][[분류:부여군의 문화재]][[분류:백제/고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