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연(동진) (문서 편집) [include(틀:진서)] [목차] [clearfix] == 개요 == 孔衍 (258 ~ 320) [[동진]]의 인물. 자는 서원(舒元). 예주 노국 사람. 《한위춘추》의 저자이자, [[공자]] 22대손. [[위(삼국시대)|조위]] 시기 대홍려를 지낸 공문(孔文)의 손자. 정남군사 공육(孔毓)의 아들. == 생애 ==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해, 고작 12세에 불과할 때 《시경》과 《상서》에 능통했고,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는 여러 주와 군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공연은 강동으로 도망쳐 [[원제(동진)|낭야왕 사마예]]의 참군 겸 기실로 배속되었다. 공연은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나 문서가 산적해 있어도 직분에 맞게 빠르게 일을 처리하였다. 대흥 원년(318년) 3월, 공연은 유량(庾亮)과 함께 중서랑에 임명되었다가, 태자중서자로 옮겨져 태자 [[명제(동진)|사마소]]를 보좌하였다. 공연은 경전에 밝고 조정의 의례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 동진 처음 세워졌을 때, 조정의 법규를 바로 세우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어 원제 사마예와 태자 사마소의 신임을 받았다. 대장군 [[왕돈(동진)|왕돈]]이 전횡을 부리기 시작하자, 공연은 태자 사마소에게 나아가 말했다. > "전하께서는 마땅히 조정에 학식 있는 자들과 재야의 준걸을 모아, 이들과 더불어 정책을 상의함으로써 성총(聖聰)을 널리 발휘하소서." 하지만 이 말이 왕돈의 귀에 들어가니, 왕돈은 이를 불쾌히 여기고 조정을 압박해 공연을 광릉군(廣陵郡)으로 전출 보내게 하였다. 당시 광릉군은 서쪽으로 [[후조]]와 인접하여 위험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광릉태수에 임명된 공연을 안쓰럽게 여겼으나, 공연은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부임하였다. 공연은 강력한 후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으니, 후조의 군주 [[석륵]]은 산양(山陽)까지 나아갔다가 공연의 명성을 듣고 칙령을 내려 부하들에게 광릉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대흥 3년(320년),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 [[춘추시대]]부터 [[5호16국시대]]까지의 서적들을 연구한 [[청나라]]의 문헌학자 엄가균에 따르면 공연의 저서로는 《한위춘추》 외에도 《춘추시국어》 10권, 《춘추후국어》 10권, 《한상서》 10권, 《한춘추》 10권, 《후한상서》 6권, 《후한춘추》 6권, 《후위상서》 9권, 《공양집해》 14권 등이 있었다고 한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공연, version=53, paragraph=2)]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258년 출생]][[분류:320년 사망]][[분류:공자]][[분류:지닝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